공자 인간과 신화(7장까지 숙제)

여울아
2020-05-25 11:00
304

제2장 공자에 관한 자료

 

공자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자료는 <사기> 공자세가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저자는 중상모략이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공자세가를 믿기보다는

공자 사후 2세기 안에 써진 책들의 기본자료로 삼는다.

공자 이전 시대에 관한 서술은 <시경>, <역경>, <서경>, <춘추> 그리고 청동기 명문 등을 이용한다.

<좌전>은 기원전 300년경에야 비로소 현재 모습을 갖췄기 때문에 신중하게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의 사상과 생애는 <논어>를 기본으로 하되, 후기 위작을 가려내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 가장 가치있는 자료로는 <맹자>라고 본다. 그는 공자 사후 100년 뒤 출생했다.

묵자는 공자 직후 저자이기는 하나 여기에 소개된 토론들은 대부분 후세에 첨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공자를 잘 알려면 <논어>와 <맹자>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 

 

댓글 6
  • 2020-05-25 12:29

    7장 교사

    공자 이전의 학교는 궁술학교 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개인교사는 있었지만 세습 지배자나 관리를 훈련시키기 위한 교육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자의 교육은 달랐다.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여 특정기술만 가진 전문가가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지혜가 있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용감하고 교양도 있고 예악에도 정통한 사람이었다. 공자는 이런 인간이 군주나 관리가 되어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일 때 제대로 된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이 지향해야할 이상적인 인간형을 공자는 ‘군자’라고 표현했다. 원래 군자는 귀족의 성원을 뜻하여 소인(평민)과 대비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의미가 변화하여 군자는 덕성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게 되었다.
    공자의 교육 목적은 바로 제자들을 이러한 군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제자가 아닌 배움에 열정을 가진 제자들을 가르쳤다. 또 군자양성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인물됨을 관찰하여 각각 그에 맞는 방법으로 가르쳤다. 장점은 살리고 약점은 극복할 수 있게.
    교사로서 공자의 특징은 권위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공자는 편안한 자세로 제자들을 대하였고, 엄격한 규율도 내세우지 않았다. 공자가 강조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선행의 권장이었고,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었으며,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전통적인 귀족 교육과정에 있던 사술(射術)과 어술(御術)은 제외하였다. 이런 교육은 군자 교육에는 필요 없는 전쟁에 필요한 기예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중요하게 가르쳤던 것은 예(禮)이다. 예라는 한자는 제기를 표현하는 상형문자였고, 최초의 의미는 ‘제물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종교의식에서의 규범으로 광범위하게 쓰였던 예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적절한 행위 일반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예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는 적합한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관행이라도 이 적합성이란 기준에 맞으면 선왕의 관례에는 없는 것이라도 채용될 수 있다.”
    예는 단순한 예의규범이 아니며 감정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다만 그 표현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방식이어야 한다. 유가가 말하는 예의 실천은 사회의 전통적인 관행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구체적인 상황과 상식의 요구에 따라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의미한다. 예는 실제 행동에서 과(過)와 부족(不足)이 아닌 사회적으로 유익한 중간길로 행동을 인도한다. 따라서 공자는 훌륭한 인격을 가꾸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예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공자는 음악교육도 강조하였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에서 보듯 공자는 인격의 완성을 음악에서 찾았다.

  • 2020-05-25 20:11

    6장 제자

    1. 공자의 제자들
    - 70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 <논어>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가 제자인지 가리는 것이 쉽지 않다.
    - 제자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는 주유 전 제자, 둘째는 주유 후 제자.

    2. 주유 전 제자
    1) 자로
    - 최연장자로, 제자라기 보다는 '가장 친한 친구요 가장 엄격한 비판자'
    - 강직하고 엄격 : 공자에게 직접적으로 항의하고, 또 약속을 미루는 일이 없었다.
    - 타고난 무인 : 직선적이고 급한 성격으로 학자적인 행동규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 공자와 강한 유대관계 : 기질 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때문에 강한 애정 가지고 있었다.
    2) 염구
    - 자로와 반대로 이익을 철저히 따져서 약삭빠르게 길을 선택할 줄 아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 화술에 능란한 행정가이자 장군으로, 계씨가에 취직하여 계씨에게 맞춰 행동하다 공자에게 파문당할 뻔 했다.
    3) 자공
    - 자로와 염구 사이에 있는 인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면서도 능력도 뛰어났다.
    - 현명하고 사리에 통달했고, 웅변술에 뛰어났다.
    4) 안회
    - 공자의 애제자로 현명하고 유덕할 뿐 아니라, 근면했다.
    - 안회는 공자처럼 끝내 관직을 얻지 못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 공자가 크게 슬퍼하였다.
    5) 재여
    - 화술이 좋은 것이 유일한 장점으로, 공자에게 많이 혼났다.

    3. 주유 후 제자
    1) 유약
    - 공자를 닮았다고 하여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모셔놓고 섬기기도 했다.
    2) 자유
    - 의례에 관심이 많았다.
    3) 자장
    - 후기 제자 중 가장 정력적으로 보인다. 매사에 지나치나는 평가를 받았다.
    - 관직과 명성을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도를 대충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참지 않았다.
    - 다른 제자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았다.
    4) 자하
    - 공자의 가르침을 전수화하고 체계화한 사람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 자장과 반대로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다.
    - 공자와 달리 그 가르침을 현학적으로 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읍재 경력도 있었다.
    5) 증삼
    - <맹자>에 나오는 효 일화로 유명하다.
    - 개인의 수양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4. 주유 전과 후 제자들의 차이
    - 초기 제자들은 초기 공자처럼, 후기 제자들은 후기 공자처럼 되려고 했을 것이다.
    - 초기에 제자들은 정치적참여를 원하였다.
    - 후기 제자들은 교육과 의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개인에게 덕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 2020-05-26 01:54

    3장 공자시대의 중국
    기원전 1200년경 주왕조가 건설되었다.
    주 왕조는 봉건제도체제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제후들의 세력은 점 점 커지고 급기야 기원전 771년 이적의 칩입을 받아 수도를 동쪽인 낙양으로 옮겨 가며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다.
    동주의 왕들은 제후들의 보호아래 낙양에 자리를 잡게 되었기 때문에 왕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제후들의 손아귀에 든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렇듯 왕의 정치능력이 상실하자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힘 있는 제후국들간에 임시방편의 지도체제가 결성되었다. 동맹국중 가장 강력한 제후가 패(覇)라는 칭호를 쓰며 왕을 대신한 일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주시대 이후 2세기 동안 대 여섯명의 제후가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 시대 제후국들은 황하를 중심으로는 동주를 비롯해 중국의 전통과 순수성을 표방하는 중원국가들인 송, 정, 노나라 등이 있었으며 중국문화권과는 거리가 있는 초, 진. 제 와 같은 대국들이 변방에 위치해 있었다.
    중원국가들은 규모나 힘은 작았지만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강조하는 사상가들이 많았고 반면 힘과 규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변경국가들에서 많이 나왔다.
    이 시기는 변경지역의 강국들간의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고 그 사이에서 중원지역의 소국들은 그들의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중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는 다른 중원소국들에 비해 강국들의 시달림을 덜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왕조의 창시자의 동생이었던 주공의 나라이고 고대문화 와 의식의 보고로 여겨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노나라의 국내정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 다르지 않았다. 봉건제후들이 왕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듯 제후국 내부에서도 유력한 대신의 일족들이 군주를 희생시키며 권력을 탈취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 노나라에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삼대 가문이 있었는데 맹 (孟), 숙(叔),계(季) 가문( 三家)이다.
    삼가( 三家)는 공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노공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기원전 537년 (공자 15세)에는 계씨가 노국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노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권위와 질서의 기반은 사라지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폭력의 균형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들의 수는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이후 귀족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지나 관직은 고사하고 빈곤에 빠진 궁사층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전사나 검객이 되기도 했지만 관리나 서기 철학자가 되었다. 그들은 현실에 대한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증오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그 들 중 한 사람이 바로 공자이다.

  • 2020-05-29 21:44

    제 5장 인간

    H.G. 크릴은 < 논어 >를 통하여 공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공자는 온화하지만 단호하였고,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다. 공손함과 편안함을 가졌다고 했다. 동료들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고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 즉, 군주나 권세 있는 세습귀족들과 대화 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처세가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다. 쾌락의 원천으로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략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 같다. 그는 스스로 관악기의 일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형식은 다르지만 전체주의로 기울고 있었던 다른 학파들은 모두 향락을 부정하는 경향을 띠고 있어 이들과 비교되었다. 예를 들면, 묵자와 그 학파는 경제적 생산에 공여하지 않는 모든 행위를 부정했다. 노자는 생활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비난 하였고, 무욕(無慾)상태를 원했다. 완전무결한 전체주의자인 법가들은 인간이 생각이나 감정도 없는 국가의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유교가 사람들의 매력을 끈 비결은 평범한 사람들이 감정과 욕구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백성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면 정부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에게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인생을 설계하라고 했다.
    공자는 현실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고, 타인을 초라하게 만듦으로서 자신을 위대하게 포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해학 감각을 가진 열정가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공자 역시 성자도 아니었고 완전무결한 사람도 아니었다.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자제력이 강했으나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2020-06-01 17:11

    1. 전설과 진상

    젊은 공자는 귀족들의 향략을 위해서 백성이 탄압당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이것을 시정하기 위한 노력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공자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주변을 설득하고, 가르침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교사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그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지배자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는 기준은 백성의 행복과 복지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었다. 공자는 무혈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무혈혁명이란 군주의 권력을 공적 기준으로 선발된 대신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정부의 목적을 백성의 행복과 복리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의도만으로 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추구하는 주장에 대한 열정을 제자들에게 전하려 노력했다. 공자는 이 점에서 크게 성공했다.
    공자가 죽은 뒤에,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이 계승되어 그의 사상(유가)의 영향력은 아주 커졌다. 이렇게 된 것은 유가의 두 가지 원칙이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1)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은 가문이 아닌 덕고 능력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2) 정부의 진정한 목적은 백성들의 행복과 복리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秦)나라에서 유가의 가르침은 유포가 금지되었고 한(漢)왕조에서는 한무제가 유가 애호자를 자처하면서 전체정치의 정댕화에 유교가 악용되기도 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고 영향력은 더 커졌지만 그의 전설은 윤색되기 시작했다. 유가의 사상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꾸며낸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민주주의적인 생각에 당혹감을 느끼고 공자를 무한한 황제 권력의 지지자로 묘사하려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2000년동안 이어져온 이 일로 인해서 공자의 실제를 발견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졌다.
    17, 18세기 중국에서 학자와 관료가 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쓰레기처럼 쌓인 해석을 무시하고 공자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공자의 사상은 그들을 통해서 계몽주의로 철학적 운동 직후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공자의 철학은 문필가들에게 인용되고 유럽 민주주의 이상의 발전 및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유교가 서구 민주주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가 하는 기묘한 이유 때문에 가끔은 망각되고 있지만, 이 점은 명확한 고찰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자에 대한 오랜 오해는 그 시대에서 그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없던 것과 같다. 완벽히 그의 사상이 이해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면 지금까지 오래도록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인용된 말처럼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논어는 계속해서 ‘상황을 약간 촉진 시킬 뿐’인 걸지도 모른다.

  • 2020-06-01 22:40

    .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98
묵가는 왜 소멸했을까?
여울아 | 2023.06.27 | 조회 211
여울아 2023.06.27 211
197
후기 : 묵자와 공리주의 (1)
토용 | 2023.06.17 | 조회 220
토용 2023.06.17 220
196
묵자가 진나라의 기틀을 다졌다구요?? (1)
여울아 | 2023.06.07 | 조회 234
여울아 2023.06.07 234
195
후기 : '묵경'과 과학기술 (1)
토용 | 2023.06.06 | 조회 212
토용 2023.06.06 212
194
묵자는 반전주의자인가? (2)
여울아 | 2023.05.26 | 조회 224
여울아 2023.05.26 224
193
후기 : 묵자의 천(天)과 귀(鬼) (1)
토용 | 2023.05.22 | 조회 180
토용 2023.05.22 180
192
<절용>, <절장>, <비악>을 중심으로  (1)
여울아 | 2023.05.03 | 조회 323
여울아 2023.05.03 323
191
후기 : 묵자 사상의 키워드 兼 (1)
토용 | 2023.04.27 | 조회 198
토용 2023.04.27 198
190
묵자가 백이 숙제의 자손이란 말인가?(후기) (1)
여울아 | 2023.04.24 | 조회 207
여울아 2023.04.24 207
189
<묵자> 후기 : 묵자는 누구인가 (1)
토용 | 2023.04.17 | 조회 228
토용 2023.04.17 228
188
장자 에세이 모음 (2)
토용 | 2022.12.21 | 조회 277
토용 2022.12.21 277
187
[2023 제자백가세미나] 전쟁과 평화의 시대, 묵가와 병가 읽기 (2)
여울아 | 2022.12.20 | 조회 846
여울아 2022.12.20 846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