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처방전>2회 치매걱정편

겸목
2020-04-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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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를 걱정하는 친구에게

-윤이형의 단편소설 「루카」를 처방합니다

 

 

 

y깜박깜박’, 건망증인가 치매인가

-나 치매인가 봐.

y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건성으로 대꾸했다. 워낙 뜬금없고 엉뚱한 y의 생각에 대부분 ‘내성’이 생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은 걸 깜박하고 세탁소에 다녀와서 냄비바닥을 홀라당 태워먹었다는 y의 하소연은 사실 우리 대부분이 한두 번쯤 겪은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순식간에 ‘건망증 배틀’이 되었다.

 

-냉장고 문 열고 한참 있어. 뭘 꺼내려 했나 까먹어서.

-현금인출기 앞에서 돈 꺼내는 걸 깜박하고 왔어. 나중에 은행에서 전화가 오더라.

수시로 찾아 헤매는 핸드폰과 자동차열쇠에 대한 원망, 쇼핑몰 주차장에서 차를 찾지 못해 머리가 하얗게 되었던 순간, 고유명사를 까먹고 ‘그거 그거 그거’하며 버벅거렸던 답답함 등. 40대가 넘은 중년인 우리들에게 이런 에피소드들은 나이 먹어가는 것을 실감하는 액세서리 같은 것이다. 나이 먹으니 ‘빨간색이 좋더라’ ‘자꾸 꽃 사진을 찍게 되더라’ 하는 취향의 변화처럼, 나이 먹으니 ‘자꾸 깜박깜박하게 되더라’는 일상적인 습관의 일부가 되었다.

 

대학 강사를 하는 나는 한 학기가 끝나갈 때쯤 거의 외운 학생들의 이름을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까먹는다. 강의실 복도나 교내매점에서 학생과 마주치면 ‘아무개야’라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잘 지내지?”라고 말을 얼버무린다. 출석부에 올라있는 이름들은 비슷비슷해서 ‘서현, 나현, 세현, 세희……’ 잘못 발음하기 쉬운데, 간혹 잘못 부르면 학생들은 마치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처럼 상처 받았다. 그래서 매번 출석부를 다시 확인하고 혀에 힘을 줘서 실수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이름에 대한 ‘강박’ 때문인지, 학기가 지나서 학생들을 만나면 그 학생이 무슨 학과이고 기말에세이로 무슨 글을 썼는지도 기억이 나는데 이름만 생각나지 않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이것은 선택적 기억상실인가?

 

-또 냄비 태웠어. 집에 딸이 혼자 있다 놀랐다니까. 집안이 연기로 꽉 차서.

또 다시 냄비를 태워먹은 이야기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y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던 환절기라서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인지, 혹은 다른 질병이 생긴 것은 아닌지 병원을 다니고 있다며 y는 한동안 외출을 자제했다. 갱년기증상으로 조기치매가 온 것이 아닌지 y의 걱정은 조금 더 심각해졌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y와 나는 나이가 한 살 차이다. 내가 학기마다 학생들의 이름을 헷갈려 하면서도 치매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내 또래인 y도 치매일 리 없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내가 그렇듯이 기억해야 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지다 보니, 한 두 개쯤 빠트리는 것이 생길 수 있다고 보았다. 몇 년 사이 y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던 앵무새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가족 모두 깊은 슬픔에 빠졌는데, 특히 남편이 힘들어해서 y는 여행도 가고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그리고 따로 사는 시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해서 매주 한 번씩 병원으로 모시고 다녔다. 분당과 서울을 오가는 장거리 운전의 피로도 y의 건망증에 한몫을 했을 것이다. 또 y가 말끝마다 입에 달고 사는 외동딸이 그해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새로 알게 된 학부모들과의 관계나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도 아이 못지않게 y에게도 가중되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나가는 모임에서도 y는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되는 갈등과 불화를 겪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y가 뭔가를 깜박깜박 잊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y가 요즘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져 마음고생이 늘었겠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어림짐작과 진단이야말로 ‘절친의 견적’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y가 함께 보낸 세월도 어느 새 십여 년이다. 그런데 y의 일상을 훤히 꿰고 있는 것처럼 ‘아는 척’을 하고 나니……어쩐지 내 마음이 의심스러워졌다. 나는 정말 y를 잘 알고 있을까?

 

 

 

 

우정에 가는 소리, 친구인가, 이웃인가, 남인가

y는 ‘치매인가 봐’ ‘공부머리가 없어’처럼 자신을 단정 짓는 말들을 툭툭 던질 뿐, 요즘 자신의 심사가 어떤지 그 속내를 시시콜콜 말하지는 않는다. 나와 한 살 차이인데도, y와 나의 라이프스타일은 많이 다르다. 결혼을 일찍 해서 이미 아이들이 대학생인 나와 달리 y는 결혼도 늦고 아이도 늦게 낳았다. 나와 y의 출산과 양육에 대한 경험은 아이들의 나이 차이만큼 크다. 서른에 대학원에 진학해서 어떻게든 경력을 이어가려는 나와 달리 y는 유학을 다녀와서 MBA 학위가 있는데도 전업주부로 살고 있다. 한때는 꽤 이름이 알려진 홍보회사에 다녔고 진보정당에서도 일을 했다는 y에게서 ‘경력단절’을 아쉬워하는 소리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 3년 동안 y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번다한 일주일의 스케줄 가운데 y와 함께 하는 세미나는 나에게 우선순위 1위였다. 우리는 매주 하루는 같이 세미나를 하고, 수시로 세미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에세이를 쓸 때는 한밤중에도 서로 ‘톡’을 날렸다. 우리는 만나서 스피노자의 철학이니 이반 일리치의 사상이니……하는 책 속의 말만 떠들어댄 것일까?

 

아주 사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엄마들이다. 우리 중엔 동화를 쓰는 사람도 있고,

번역을 하는 사람도, 외주 편집자도, 프리랜서 웹 다자이너도, 패션지 자유기고가도 있다.

유명인은 없지만 다들 쓰는 일에선 한 가락씩은 한다. 망해가고 있다고 알려진 한국 출판계 최후의 성실한 독자들이며,

팬들이며, 독설 넘치는 비평가들이기도 하다. (중략)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토요일마다 빈집에서 아이와 마주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아이와 컬러링북을 칠하거나, 와서 김장을 하라는 시어머니의 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가고 싶으면 유아차라도 끌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러면 ‘맘충’ 취급을 받지 않겠느냐고 볼멘소리로 대답하면서도,

인파 속에서 밀리고 밟히다 아이가 혹시 다칠까 겁내는 마음이,

차가운 초겨울 바람이 아이의 볼을 꽁꽁 얼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실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나약한 핑계이고 열등감이 아닐까,

나는 실은 전혀 정치적 존재가 못 되는 게 아닐까, 자

기검열을 하다 마음을 다친 채 새벽 두시에 책상 앞에서 맥주 캔을 따는 사람들이다.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9~10쪽)

 

소설가 윤이형의 최근 작품들은 나와 y처럼 함께 공부하거나, 인터넷커뮤니티 활동을 하거나, 페미니즘운동을 벌이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최근작 『붕대감기』(마음산책, 2020년)에는 한 명의 남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기혼과 비혼으로 구분지어지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들의 친목, 미러링과 탈코르셋에 동의하는 헤어디자이너의 복잡한 심경, 교내 미투사건에 연루된 교수와 학생의 연대, 회사 선후배에서 생활 동반자로 관계의 전환을 모색하는 중년의 독신들 등. 『붕대감기』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조각 맞추기를 한 모자이크화이다. 윤이형의 소설은 남자 대 여자, 이성애 대 동성애, 전업주부 대 워킹맘처럼 선명히 드러나는 대립보다는 그러한 분할선 위에 그어진 미세한 균열에 집중하고 있다. 그 미세한 균열에서 들려오는, 들릴락 말락 하는 작은 소리들은 윤이형의 신경줄을 곤두서게 한다. 그래서 윤이형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마음의 ‘금’이 가는 균열의 순간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한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작은마음동호회’는 윤이형의 태도와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우리’ 사이에 그어지고 있는 관계의 ‘실금’들을 대범하게 넘기지도, 문제를 명료하게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소심한’ 사람들의 마음의 요철(凹凸)을 핀셋으로 골라낸 듯 ‘콕’ 짚어준다. 윤이형은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게 여자들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윤이형의 우정은 다음과 같다. 같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편협함’과 ‘단호함’에 꾸준히 균열을 내는 일이다.

 

말을 할 때마다 상처가 생기지만 그래도 말을 건넨다. 화해나 행복이나 위로를 위해서는 아니다.

나는 우리가 왜 함께할 수 없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 우리가 서로의 어떤 부분에 무지했고 어떤 실수들을 했는지,

어떻게 해야 같은 오해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자세히 이야기 나누고 부끄럽게 적어두고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함께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나를 닮은 누군가가 너를 닮은 누군가를 언젠가 만나는 상상을 한다.

다르다는 것,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영원히 등돌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어떤 시간들을 묶었다. 이 부서진 말들, 아직도 답을 모르는 질문들이 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윤이형, 『작은마음동호회』, ‘작가의 말’ 중에서)

 

 

 

 

y의 치매 걱정은 문득 나에게 질문을 가져왔다. 나는 y를 잘 알고 있을까? 모르는 것일까? 나는 y의 친구인가, 이웃인가, 남인가? 이 곤란한 질문을 앞에 두고 나는 y와 이야기를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보면 함께 중년의 시간을 공부로 보내고 있다는 각별한 동료의식만큼,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에티튜드’도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는 안전거리였다.

 

 

y와 대화스토리의 빈틈들

-요즘 신경 많이 쓰는 일이 있었어?

-아니.

-그때 일을 중간에 그만두게 됐을 때 속 많이 상했지? 사람들의 쑥덕대는 소리도 듣기 싫고.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대놓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어. 내가 또 이러쿵저러쿵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그때 에세이 쓰면서 마음이 많이 정리됐지.

그랬다. 공부를 좋아하는지 열심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y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에세이 속에서 풀어내려 애를 썼다. 공부가 모자라 시원스럽게 정리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러고 나면 한동안 몰두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후련하다고 했다.

-그래서 공부하는 거구나! 나는 y가 뭔가 성취욕이 없어 보여서 남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내가 공부를 잘 했으면 벌써 그만뒀을 걸. 뭐가 뭔지 몰라서 계속하고 있는 거야.

 

세미나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다가 그렇지 않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했지만, y와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나와 알고 지낸 십년 이전의 y는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친구들이 있는지, 직장을 그만둘 때 괴롭지는 않았는지 등등 긴 ‘호구조사’의 시간을 가졌다. 진보정당에서 공공보육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했는데, 정작 자신이 아이를 낳아서 키우려니 공공보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y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y는 무엇이든 명확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지만, 스스로 수긍이 가면 누구보다도 실행력이 뛰어났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y에 대한 정보에는 스토리텔링이 빠진 이력과 스펙만 입력되어 있었다.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 직장, 집안일, 공부로 치여 사느라, 나와 같이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대충대충’ ‘건성건성’ 알아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문제’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겨울 y는 바빴다. 매일 매일 처리해야 할 일들을 해치우느라 정신 바짝 차리고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러느라 ‘치매 걱정’은 쏙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바쁜 일정 사이사이 우리는 한두 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당시 읽고 있던 윤이형의 소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y는 유학시절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불운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고, 공부한답시고 멀어진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y는 인간관계에서 ‘안달복달’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매일 매일 해치워야 할 일이 많아진 지난 겨울의 스케줄은 y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바쁜 y를 붙잡고 가끔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문득문득 중년 여자들의 우정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뾰족한 결론은 없다. 그런데 아주 작은 변화는 있다. 내가 내 또래인 y가 나와 비슷하리라 짐작하고 넘어갔던 일들에 대해 y는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할수록 ‘엉뚱하다’ 생각했던 y의 캐릭터가 조금은 이해됐다. 물론 이야기를 나눈 시간만큼 정비례로 이해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반비례로 불일치하는 것도 아니니 낙담할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해와 오해 언저리를 오가며 서로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

(윤이형, 「루카」, 『러브 레블리카』, 150쪽)

 

 

 

 

「루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두 사람, 루카의 연인이었던 딸기와 루카의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연애의 실패담이다. 가장 루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자부하는 두 사람에게 루카의 상실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 그런데 나는 이 새드엔딩이 해피엔딩보다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루카의 상실을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백’으로 비워둠으로써 이들의 연애담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아직 모르는 y의 이야기와 그 공백도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십년간 같이 공부한 y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은 ‘끝’이 아니다. 그 공백과 균열의 틈새로 우리의 우정이 물들어가기를 기대해본다. 최근 문학상 운영과 관련해서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에게도 나의 우정이 전달되기를 기대해본다. 나는 독자로서 우리의 ‘편협함’과 ‘단호함’에 균열을 만드는 윤이형의 소설이 계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치매로 시작했지만 우정에 대한 처방전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사족. 치매를 걱정하는 y를 위해 책을 몇 권 읽어봤다. y가 기억해둘 만한 몇 가지 메모를 남긴다.

첫째, 수험생에게 좋다는 음식을 먹도록 해. 두뇌 회전과 뇌세포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 수험생뿐 아니라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음식이더라. 카레, 견과류, 식물성 단백질 그 중에서도 쥐눈이콩이 특히 좋대.

둘째, 치매와의 전쟁은 성인병과의 전쟁과도 같아.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등은 혈관성 치매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성인병을 예방하는 식단(쉽게 말해서 맵고 짠 음식을 피하는)과 규칙적인 운동을 생활화하도록 해.

셋째, 독서, 낭송, 필사와 같은 두뇌활동을 규칙적으로 하라는데, 이건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 늙어서까지 계속 같이 하자.

마지막으로, 증상이 의심스러울 때는 조기 진단을 받도록 하라는데, 요즘 이런 시스템은 잘 되어 있대. 걱정되면 검사 한 번 받아 봐도 좋을 것 같아.

 

내가 읽은 책에는 “치매, 알고 미리 대비하면 예방/극복할 수 있”다고 쓰여 있는데(『아하! 치매 전문가가 들려주는 99가지 치매 이야기』, 부산울산경남치매학회, 2017년), 이 ‘예방과 극복’은 치매에 안 걸리거나 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면 치매의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고, 환자와 가족이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면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초기 증상을 무시해서 병을 키우거나, 치매환자의 이상행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온 가족이 ‘멘붕’에 빠지는 최악의 상태를 피하자는 메시지였다.

 

y의 치매 걱정 때문에 찾아봤지만, 나는 그 책들을 통해 나도 치매로부터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속도로 치매 환자가 늘고 있는데, 선진국에 비해 4배의 속도라고 한다. 이런 속도로 가면 2024년에는 치매 환자가 1백만 명이 된다고 한다(안인숙, 『치매, 알면 길이 보인다』, 미다스북스, 2019년)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는 치매 환자이거나 치매 환자의 보호자로 살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치매는 빠른 속도로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y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댓글 12
  • 2020-04-27 15:57

    저도 요즘 X와 S와 Z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글이 가슴으로 훅~들어오네요. 관계에서 너무 가까이 가지않으려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배려인지 무관심인지 저도 헷갈리더라고요. 처방해준 책이 읽고싶어져요.

    근데, 샘!
    우리는 알콜성치매 걱정해야할듯~
    적절한양의 술을 마시는 기술이 필요해요. ㅎㅎ

    저도 ATM기에 출금신청 해놓고 그냥와버려 은행에서 걸려온 전화받았다는......ㅠㅠ

    • 2020-04-27 16:33

      맞아요...알콜성치매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적절하게 잘 마시는 신공을 연구해봐야지요!!
      그럴려면 교보재가 필요해서...참...

  • 2020-04-28 20:57

    팟방으로 들어도 좋고
    글로 읽어도 좋아요
    소개해주신 책들 다 읽어보고 싶은데 자꾸 까먹어요 ㅎㅎ

    • 2020-04-28 21:29

      잎사귀양님 팬서비스를 준비해볼게요^^
      감사합니다!!

  • 2020-04-29 11:18

    전 사실 팟케스트의 경우, 집중해서 잘 안 듣게 되더라구요.
    뭘 하면서 들리기는 하는데, 듣고 있지는 않게 되는 듯.
    그런데, 글은 어쨋든 눈에 집중해서 읽어야 하거든요.
    잘 읽었어요.
    답이 없는 질문들과 마주하기. 새털샘의 책에서도 그렇게 느껴져요.

  • 2020-04-30 10:09

    관계에서 빈틈을 인정하지 못했던 지난 날의 내가 생각나네요.

    "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딸기처럼 루카처럼 살고 싶네요...

    y는 처음 봤을 때랑 지금이랑 다른데
    그녀가 달라진건지 내가 달라진건지 모르겠네요. ^^
    암튼 요즘 y가 보기 좋습디다..

  • 2020-04-30 20:32

    전 주로 월든에서 혼자 작업할 때 인문약방의 팟캐스트를 듣습니다.
    오늘도 들었는데 귀에 쏙쏙 너무 잘 들어오더라구요.
    글로 읽을 때보다 더 좋았습니다.
    앗, 청량리샘이랑 반대네요 ㅋㅋㅋ

    • 2020-05-03 17:04

      쓰기 읽기 듣기...셋이 다 다른 맛이 있어요.
      저도 <문학처방전>을 준비하며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 2020-05-05 17:08

    글을 읽고 y가 누구인지 궁금했고..... 윤이형의 책이 보고 싶은 맘이 들어서 살짝 설렜고....

    그러다 이 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겠지.. 잠시 슬퍼졌어요. 하지만.... 댓글을 읽고 새털샘이랑 콩땅이랑 술 한 잔 하면 좋겠구나... 싶었죠!

    가까운 누군가를 두고... 이런 글로 전하는 마음이 ... 그냥 좋군요!! ^^

    • 2020-05-05 19:50

      곰도리편도 하나 써야겠네요. g에 대해서...

  • 2020-05-06 01:46

    편협함과 단호함에 균열을 낸다는 것이 무엇일까? ... 생각해봅니다.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 2020-05-06 08:33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이 연애에 한정되지 않은 인생사의 직관이란 생각이 들어요.
      편협함과 단호함도 그것의 또 다른 버전으로 느껴지고.
      각자 모두 잘 살고 싶으니까....우리는 뭔가를 하게 되지 않을까?
      잽잽잽 어퍼컷을 날리며....

아스퍼거는 귀여워
  - 글 속에서 아이의 지칭을 ‘감자’로 변경. 감자를 좋아하는, 감자같이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     새 학기다. 초조하다. 애써 웃음 지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다. 우리 감자는 이제 5학년. 개학하기 2주 전부터 서서히 어둠이 도사린다.  “엄마,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걸까요?”     몇백 번은 이야기 했을 텐데…. 모르는 게 아니지만 가기 싫은 마음으로 질문한다는 걸 안다. 또 답할 수밖에. 먼저 1단계 협박.    “응,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안 가면 엄마가 잡혀가.”     팩트 체크. 사실 감자는 때에 따라서 홈스쿨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구구절절 학교의 장점을 이야기해봤자 감자에게 와 닿는 건 없다. 학교 공부도 지루하고 친구도 없는 아이에게 먹힐 리가. 다음은 2단계 공감.    “근데…. 엄마도 진짜 학교 가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었어. 어릴 때 소심하고 친구도 없어서 맨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종이접기하고 그랬지.”  “진짜 엄마도 그랬어요?”  “그래 진짜지. 아빠한테도 물어봐.”     3단계 동조.    “그래 아빠도 그랬어. 근데 그냥 학교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에이 도움이 안 된다. 쩝, 다시 2.5단계 공감+희망.    “엄마도 그래. 쉬다가 약국에 일하러 가는 거 얼마나 가기 싫은 줄 알아? (오바) 몸이 천근만근이라고 (이 정도는 아님) 근데 막상 가잖아? 그럼 또 재미있다?”     협박과 공감과 회유 사이를 무한 반복하면서,...
  - 글 속에서 아이의 지칭을 ‘감자’로 변경. 감자를 좋아하는, 감자같이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 현재 초등학교 5학년생.     새 학기다. 초조하다. 애써 웃음 지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겁다. 우리 감자는 이제 5학년. 개학하기 2주 전부터 서서히 어둠이 도사린다.  “엄마, 학교는 왜 가야 하는 걸까요?”     몇백 번은 이야기 했을 텐데…. 모르는 게 아니지만 가기 싫은 마음으로 질문한다는 걸 안다. 또 답할 수밖에. 먼저 1단계 협박.    “응,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안 가면 엄마가 잡혀가.”     팩트 체크. 사실 감자는 때에 따라서 홈스쿨링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하지만 구구절절 학교의 장점을 이야기해봤자 감자에게 와 닿는 건 없다. 학교 공부도 지루하고 친구도 없는 아이에게 먹힐 리가. 다음은 2단계 공감.    “근데…. 엄마도 진짜 학교 가기 싫고, 공부도 하기 싫었어. 어릴 때 소심하고 친구도 없어서 맨날 맨 앞자리에 앉아서 종이접기하고 그랬지.”  “진짜 엄마도 그랬어요?”  “그래 진짜지. 아빠한테도 물어봐.”     3단계 동조.    “그래 아빠도 그랬어. 근데 그냥 학교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에이 도움이 안 된다. 쩝, 다시 2.5단계 공감+희망.    “엄마도 그래. 쉬다가 약국에 일하러 가는 거 얼마나 가기 싫은 줄 알아? (오바) 몸이 천근만근이라고 (이 정도는 아님) 근데 막상 가잖아? 그럼 또 재미있다?”     협박과 공감과 회유 사이를 무한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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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 | 조회 213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나는 마젠마 회원~     우리 동네 금천에는 ‘마젠마’라는 단체가 있다. ‘마을에서 젠더를 마주하다’를 줄인 것이란다. 2013년부터 무려 글쓰는 엄마동아리로 시작해, 2015년에는 금천구마을활동가 모임으로 재구성했고, 2020년 여성의 사회적 성장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로 변신을 이어온 단체였다. ‘우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뉘’. 좀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있어 보이는 단체명을 가진 마젠마를 빨리 접하고 싶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2023년 5월 23일, 함께 영화 보기 행사를 하는 것을 발견했다. 당근 신청했고, 당근 참석했다. 함께 볼 영화는 <와즈다>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여성에게 금지된 자전거 타기를 도전하는 소녀 와즈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본 장소는 마을공동체 지원센터였다. 마을 공유공간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는 경험은 처음이라 마을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그리고 마젠마의 대접도 융숭해 더 만족했었다.       그러다 여름에 마젠마 신입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고, 망설임 없이 바로 가입했다. 가입신청서를 낸 얼마 후 신입회원 환영회가 있었다. 상반기 활동을 공유하고 각자 자신을 표현하는 물건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입회원 웰컴 선물도 증정해줬다.^^ 마을에서 여성들끼리 이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 몸과 마음이 훈훈했다. ‘이런 게 비빌언덕이지. 이런 단체가 하나쯤은 동네에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짜 이런 단체가 우리 마을에 존재해줘서 고마웠다.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기존 멤버들과 나도 이제 같은 멤버라는 소속감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마젠마 회원이다~.             그 후로도...
김윤경~단순삶
2024.03.20 | 조회 232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떨어지고 난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며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서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떨어지고 난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며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서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현민
2024.03.16 | 조회 162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도라지
2024.03.10 | 조회 249
기린의 걷다보면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기린
2024.03.05 | 조회 25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경덕
2024.03.02 | 조회 301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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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 조회 295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김윤경~단순삶
2024.02.20 | 조회 359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쌤! 집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인문약방 사람들과 평창집에 간 문탁쌤의 전화 속 목소리이다. 불이라고요?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보니, 밤 11 시 35분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다. "어디에 불이 났어요?" "지붕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외부는 붉은 벽돌, 내부는 흙벽돌 그리고 지붕은 기와인데, 어떻게 지붕에서 불이 났다고 하지? 문탁쌤이 잘못 알았거나 꿈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생중계되는 지붕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고 불이 난 연기로 보인다. 어? 진짜 불이 났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우리집 소화기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옆집들을 전화로 깨워서 동네 소화기들을 동원시켰다. 사실, 지붕에서 연기가 난다면 소화기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또 없나?  전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산불 감시원인 옆집 친구에게 전기 차단기부터 내리도록 부탁했다. 지붕의 화재를 잡기 위해서 소방수들은 지붕을 무식하게 걷어 낼텐데..... 온돌방은 포기하고 본채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소방차가 7대나 왔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이라서 불이 산불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고, 불이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친 사람이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음 날, TV에서 보던 그 모습이 우리 집 온돌방에서 펼쳐진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와...
  쌤! 집에 불이 난 것 같아요.        인문약방 사람들과 평창집에 간 문탁쌤의 전화 속 목소리이다. 불이라고요? 침대에서 일어나며 시간을 보니, 밤 11 시 35분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얼떨떨하다. "어디에 불이 났어요?" "지붕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외부는 붉은 벽돌, 내부는 흙벽돌 그리고 지붕은 기와인데, 어떻게 지붕에서 불이 났다고 하지? 문탁쌤이 잘못 알았거나 꿈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생중계되는 지붕 안쪽에서 나오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고 불이 난 연기로 보인다. 어? 진짜 불이 났네. 정신이 번쩍 든다. 일단 우리집 소화기 있는 장소를 알려주고, 옆집들을 전화로 깨워서 동네 소화기들을 동원시켰다. 사실, 지붕에서 연기가 난다면 소화기로는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다. 또 없나?  전기!!!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산불 감시원인 옆집 친구에게 전기 차단기부터 내리도록 부탁했다. 지붕의 화재를 잡기 위해서 소방수들은 지붕을 무식하게 걷어 낼텐데..... 온돌방은 포기하고 본채로 번지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소방차가 7대나 왔다. 산 중턱에 있는 집이라서 불이 산불 등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바람이 불지 않고 있고, 불이 커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친 사람이 없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다음 날, TV에서 보던 그 모습이 우리 집 온돌방에서 펼쳐진다. 아침 일찍부터 경찰서와...
가마솥
2024.02.17 | 조회 365
현민의 독국유학기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현민
2024.02.16 | 조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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