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인생극장/8회> 관포지교(管鮑之交), 나의 수많은 포숙들을 기다리며

기린
2020-03-16 00:31
525
  1. 환공을 패자로 만든 관중과 포숙

 

 노(魯)나라 환공이 제(齊)나라를 방문하면서 제 양공의 여동생인 부인을 대동했다. 결혼하기 전부터 연인관계였던 양공과 여동생은 환공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났다. 환공이 그것을 알게 되어 부인에게 화를 냈고 양공은 사람을 시켜 환공을 죽여 버렸다. 양공의 동생들이었던 규와 소백은 형의 이러한 행실 때문에 화가 자신들에게도 미칠까 염려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쳤다. 관중은 둘째 왕자인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포숙은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갔다.

 

 

 결국 양공은 자신의 부하였던 무지에게 목숨을 잃었다. 무지가 제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그에게 원한이 있던 무리들이 일어나 그를 처단해 버렸다. 그리고 규와 소백 가운데 한 사람에게 왕위를 계승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왕자는 각각 노나라와 거나라에서 출발했고, 누가 먼저 제 왕실에 도착할 것인지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 제나라로 향하는 길목에서 소백의 무리를 마주친 관중은 소백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혔다. 소백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관중은 뒤따라오던 규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일행은 느긋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그 시각, 소백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귀국을 재촉하여 먼저 제 왕실에 도착해 왕위를 차지했으니 바로 제 환공이다. 그는 복대에 화살을 맞은 후 죽은 시늉을 하며 관중을 속였던 것이다. 이후 환공은 노나라를 협박해 규 왕자를 처단했고 관중은 제나라로 불러들여 죽이겠다고 호송시켰다. 환공을 모셨던 포숙이 나섰다.

 

-임금께서 제나라를 다스리겠다면 지금의 신하들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천하를 차지하겠다는 뜻이 있다면 관중 없이는 안 됩니다.

 

 환공은 포숙의 의견을 수렴하여 관중을 살려서 대부로 삼았다. 그 후 관중은 제나라를 정비하여 환공을 춘추시대의 첫 번째 패권자로 만들었다. 환공을 보좌하여 천하의 제후들을 규합하는데 힘썼고 북쪽 오랑캐들을 평정하여 제후국들의 신임을 샀다. 안으로는 바닷가에 위치한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주변 제후국들과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았다. 관중의 이러한 활약으로 제나라는 고대 중국에서 일찌감치 부강한 나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천하를 차지했던 이들은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요임금과 순이 그랬고 탕왕과 이윤, 주 무왕과 강태공도 있었다. 이들의 협력으로 천하의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반면, 세가에 실린 환공의 면면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환공을 모셨던 포숙은 관중의 능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여 천하를 차지하고 싶은 환공의 야심도 자극하면서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도 구하는 계책을 내기에 이르렀다. 관중은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서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환공을 춘추시대 첫 패자로 만든 두 사람의 협력,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2. 포숙이 없었다면

 

관중이 재상이 되어 제후를 능가하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그는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를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임금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 소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사기열전』 25쪽? 김원중 저/ 민음사)

 

 

 만약 내가 친구와 함께 동업을 했는데 친구가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간 것을 알게 되었다면 일단 욕심을 부린다는 생각부터 들 것이다. 그게 통념이다. 그런데 포숙은 그 통념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관중이 일에 실패하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전쟁에서 도망치는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실패도 하고 전쟁에 나가면 죽을까봐 두려워 도망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이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을 알게 되면 어리석다거나 겁쟁이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포숙은 그렇게 작동하는 통념을 멈추고 다른 측면을 살폈다. 그렇다면 ‘알아준다’는 것은 어떤 국면에서 통념대로 반응하기를 멈추고 또 다른 사정까지 살펴서 행동함이다.

 

 사마천은 관중의 열전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송하기보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포숙을 더 찬미했다고 했다. 포숙은 어떻게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관중이라는 친구를 사귀어 그에게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공감과 이해는 매뉴얼이 없다. 매순간 묵묵하고도 아슬아슬한 실천만 있을 뿐”(은유, 한겨레신문 <삶의 창> ‘연민과 배려사이’) 이라고 했다. 친구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매순간 일어나는 통념을 넘어 맥락을 살피는 실천이 거듭되었다. 그 실천이 천하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관중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결과는 두 사람 모두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포숙의 능력은 친구에게 공감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실천하는 가운데 터득된 것이다. 관중 역시 그런 포숙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 노련한 관중이 모를 리가.

 

3. 나의 수많은 ‘포숙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외신을 접했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서 최근에는 WHO에서 ‘펜데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사태가 심각해지는 만큼 그에 대응하는 방법도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공동체의 주방을 맡고 있는 나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점점 복잡해졌다.

 

 

 감염자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1년짜리 프로그램인 이문서당 개강은 무리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주방도 잠정적으로 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탁 전체는 닫을 수 없으니 공부하러 나오는 회원들이 알아서 도시락도 싸오고 주방에 있는 재료들로 밥이나 해 먹자고 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가자 점심상에 모이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코로나 확진자 수도 점점 늘어났다. 밥을 함께 먹는 식구들 사이에 감염이 가장 잘 되는 상황이라는데 경계가 느슨해졌다고 할까. 언론을 통해 감염을 막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한다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좀 더 삼가는 행동이 필요하다며 주방을 완전히 닫자는 제안을 했다.

 

 공식적으로 주방을 열지 않는다고 결정했으니 각자의 감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제안은 그 감각을 믿지 못하겠으니 강제적으로 금지하자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반발하는 마음이 들었다. 월요일에 나 혼자서라도 밥상을 차려야겠다는 다짐까지. 그런데 막상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그 다짐이 귀찮아졌다. 친구가 저렇게 염려하는데 그냥 쉬면 또 어때. 결국 나는 그 날 문탁에도 안 나가고 하루 쉬었다.

 나는 삼갔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의견을 듣는 순간 강제한다는 통념부터 떠올랐다. 그 순간을 인식하고 멈추었다면 코로나 정국이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강제라기보다는 심각함을 반영한 대책이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반발했던 마음조차 하룻밤 자고 났더니 바뀌고 말지 않았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공동체 밥상은 차려야한다고 새겨진 나의 ‘통념’이 작동하는 순간 상황의 맥락을 알아채는 능력은 급격히 쫄아 들고 말았다. 포숙-되기가 쉬운 게 아니다.

 

 

 작년 3월 <사기, 인간극장> 첫 글의 주제는 ‘전전긍긍’ 이었다. 공동체 주방을 맡은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주방을 드나드는 친구들의 마음을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고충을 토로하는 글을 썼다. 8회 차에 ‘관포지교’를 주제로 우정에 대해서 쓰겠다고 했더니 첫 글과는 다른 내용을 쓸 수 있겠느냐고 염려 했다. 아니나 다를까 피드백이 거듭되는데도 글은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정국에서 친구의 말에 반응하는 나를 살펴보면서 깨달았다. 나의 통념, 즉 공동체 주방과 관련하여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즉각 반발이 일어나면서 다른 맥락을 살피는 힘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 반응은 공동체에서 겪는 많은 국면에서 우정을 쌓는데 걸림돌로 작동한다는 것도.

 

여전히 코로나정국이다. 그래서 주방도 공식적으로 닫혀있다. 공동체 밥상이 안 차려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던 나의 통념도 깨졌다. 동시에 모든 끼니를 공동체 밥상에서 해결했던 최근의 나에게 흉흉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보였다. 그렇게 매 끼니가 차려졌던 것은 공동체 밥상이 꼭 차려져야 한다는 나의 뜻을 ‘알아준’ 수많은 포숙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흉흉한 시간도 결국은 다 지나갈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의 수많은 포숙들이 돌아올 것이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고 포근한 봄이 오는 것처럼.

 

 

  • 8회를 끝으로 <사기, 인생극장> 연재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9
  • 2020-03-16 08:23

    자기에게는 포숙이 없다고 한탄한 사마천에겐 없었고 포숙을 기다리는 기린샘에게는 있는 건
    '공동체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연재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 2020-03-16 09:21

    기린에게 주방은 로도스구나! 자 한 번 뛰어보시오!!

  • 2020-03-16 09:32

    가끔 나에게는 게으르니님이 관중이자 포숙입니다~ 가아끔ㅋㅋ
    마지막 글에서야 댓글 다는 친구, 이런 우정을 가진 친구도 있답니다..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시 만날 글들도 기다릴게요^^

  • 2020-03-16 09:44

    우정은 친구를 끝까지 책임지는거라는데
    친구를 알아주는게 먼저겠네요
    알아주려면 일단 관심과 애정을 그에게로 향하고 그를 잘 들어야할테구요
    물리적인 격리가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코로나팬데믹 시절에 친구와 공동체가 새롭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기린샘 산고의 고통을 끝낸? 오늘을 맘껏 즐기시오!!!
    매실주 한병 콜? ㅋ

  • 2020-03-16 10:59

    벗을 향한 내마음을 돌아보는 일
    벗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한다는 것은 결국은 다시한번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가다듬는 일이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이듭니다

  • 2020-03-16 16:47

    전 : 전전긍긍이 과연 주방 일 만이랴
    전 : 전속 오지라퍼일수록 전전긍긍이 심해지지
    긍 : 긍정적 마인드? 그건 혼자만 우아한 자의 것!
    긍 : 긍께, 아무나 주방지기 하겠냐고..
    관 : 관심 좀 끊고 우아해 지고 싶어도
    포 : 포숙아들이 손짓발짓하니
    지 : 지대로 내손으로 목줄걸고
    교 : 교차로 없는 길에서 호각부는 오지라퍼 매니저들!

    수고했어요. ? 또 다른 글로 만나는 거죠?

  • 2020-03-17 08:25

    쿵짝 쿵짝~ 난 쌤 옆에서 같이 박자를 맞추다가~
    쿵쿵짝! 하고 가끔씩 삑싸리~내는 포숙일 것 같구만요. ㅎㅎ

    그동안 연재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2020-03-22 08:11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가 새삼 절절히 다가오네요
    통념을 버리고 서로의 리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걸 요즘 새삼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기린 전전긍긍하며 글쓰는 당신이 아름다웠소 ㅋ

  • 2020-04-08 18:59

    저는 포숙되기 를 과제로 삼아야 할것 같네요.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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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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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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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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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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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조회 148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63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6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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