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P> 동은 번외 - 객체라는 가능성

동은
2019-12-17 14:35
252

화요프로젝트(화요P)란? 길드다의 멤버들이 각자 고민하고 있는 지점, 발전시키고 싶은 생각들을 잘 정리해서 각자 달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업로드 합니다. 누군가는 텍스트랩 수업을 위한 강의안을 쓰고, 누군가는 길드다 이슈를 발전시키기 위한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넘치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훈련을 위한 글을 씁니다. 이를 위해 멤버들은 매주 모여 글쓰기 피드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은은 공간메니저로서 길드다 공간에 대한 고민을 풀어놓는 글을 씁니다. ...만! 오늘은 28일 청년페어에 있는 <공산품>전시를 준비하며 쓴 에세이를 에세이로 대체합니다. 28일에는 이 고민을 풀어낸 작업물이 전시될 예정이니 많이 와주세요. 감사합니다!

 

 

 

객체라는 가능성

  작년은 나에게 “가장 힘든 1년”의 랭킹을 바꾼 한 해였다. 해본 적 없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힘든 수동적인 태도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런데 나라고 힘들게 만들려고 해서 힘들게 한 것일까. 사람들은 나를 답답해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오랫동안 수동적으로 살아왔고 좋고 싫음,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이 모호했다. 원하는 것보다 당위성이 더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런 탓에 사람들은 나에게 주체적인 입장과 행동을 원했다. 어느 정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도저히 사람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것이 무엇인지 막연할 뿐이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유, 어딘가 망가진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내 스스로가 나를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 때문이었다. 그 때엔 오로지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나로서만 나를 알 수 있었다. 그 충격은 일종의 공포였으며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다고 생각했던 것, 관계를 맺어왔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나’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모조리 사라지는 경험이었다. 길을 잃은 나는 당장에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부터 시작했다. 일찍 잠드는 것, 주변을 정리하는 것, 소용없더라도 당위적인 것보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는 것. 사소하고 비루하지만 이것은 나에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내용이 되었고 함께하는 일이 되었다.

  이것이 정말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긴 할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정말 그들이 주체적인 나를 필요로 했다기보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작년은 나에게 무엇이 주체적인가에 대한 고민에 앞서서 결국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사물이라는 객체의 발견

  올 해 <공산품 스토어>의 오픈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판매할 제품을 계획하게 되었다. 우리는 제품을 만들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무엇을 생산한 것인가? 어떤 이유에서 생산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우리가 우리의 맥락과 동떨어진 것을 만들지 말자는 목표였으며 생산하는 과정 자체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려는 시도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새롭게 생산해 낼 상품과 나의 관계를 고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계 맺기’에 대한 관성적인 질문이었으나 지금까지 해온 타인-다른 주체-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사물-객체-과의 관계는 새로운 대상의 발견이었다.

  흔히 사물이라면 어떤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물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사이버 가상공간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순간 그것은 사물이 된다. 이런 사물의 생성방식은 어떤 상품을 생산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이기도 했지만 ‘나’를 사물처럼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른 이의 말로서만 판단되었던 작년의 나는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물질적으로 나의 신체는 존재했지만 ‘나’를 존재하게 했던 것은 다른 이들의 판단이었지 내 스스로가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사람들과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주체’로서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주체’가 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런데 히토 슈타이얼은 이렇게 해방의 실천으로서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언제나 종속되기 때문이다. 독재의 해방으로 얻어낸 민주주의 투표권으로 우리는 ‘자신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특정인에게 우리의 주권을 양도한다. 그 사람의 의사결정과 자신의 의사결정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투표민주주의는 사람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어주었으나 다시 어떤 절대자를 만들어 자신과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정치인과 자신이 같다고 생각했던 것은 정치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치적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뿐이다.

  이런 동일시는 우리가 재현적인 주체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슈타이얼은 주체의 자가당착을 반복할 바에야 주체의 자리에 대신 객체-사물-을 놓아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나에게 지금까지 주체가 되는 것은 좋은 것,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온 것을 완전히 뒤집는 제안이었다. 내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주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수동적인 나로부터의 해방이었고, 내 스스로가 되겠다는 욕망이었다.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상정해놓고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주체’에는 실체가 없었다. 그저 자발적인 것, 능동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었다. 슈타이얼은 어차피 계속해서 동일시가 이루어질 거라면 지금까지의 재현적인 주체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물이라는 객체의 이미지에 가능성을 걸어보자고 말한다.

 

 

사물을 인정하기 - 참여하기

  슈타이얼이 사물을 말하는 이유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주체라면 주체의 재현을 포기하자는 말이다. 어차피 완벽한 재현을 추구하는 한 주체는 영원히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슈타이얼에게 진실은 이미지의 재현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미지의 물질적 구성에 있다. 물질적 구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를 들면, 지금까지의 ‘주체’라고 생각해온 이미지에 내가 원하는 욕망과 감정, 내가 주체를 잃어버리면서 느꼈던 공포가 담겨있으며 그것들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막연하다고 생각하는 감정이나 정동, 힘같이 실체하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면 그것은 하나의 실재하는 사물이 된다.

 

  “단순히 이미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기보다 이미지에 참여하는 것은 이런 관계를 폐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미지가 축적하는 욕망과 힘은 물론 이미지의 물질에 참여하기를 뜻한다. 이 이미지가 정동과 유효성으로 표현되는 사물임을 인정해보자. 스크린, 전기라는 전자이동과 우리의 소망과 공포로 활기를 얻는 물신. 그 자체적 존재조건의 완벽한 화신이라면? (...) 이미지는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 세계의 파편이다. 그것은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이다. 당신이나 나 같은 사물이다.” 69

 

  이런 사물로서의 이미지를 인정하는 것은 더 이상 이미지의 재현이 아닌 이미지에 ‘참여’하는 행위가 된다. 사물을 인정하자는 말은 지금까지 그 대상의 역사와 사물로 인정받게 되는 역사의 충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동일시하고자 했던 ‘주체’라는 이미지 안에는 지금까지 내가 욕망하고 부정해온 역사가 담겨있다. 신뢰를 깨뜨린 나, 자발적이고 싶은 나, 그럼으로써 인정받고 싶은 나의 실재하는 욕망과 이들을 사물로서 인정하는 새로운 역사가 담겨있다. 나라는 사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역사 간의 충돌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로서 ‘주체’에 멍으로 남는다. 이 멍은 이미지가 사물로 인정받게 되면서 예기치 못하게 파괴된 후 다시 구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미지에 대해서 주체가 어떻게 해석하고 독해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완전히 객관적으로, 현상을 두고 해석해보자는 슈타이얼의 제안이다. 그 과정에서 사물로 인정받은 존재들은 왜 내가 능동적이지 못했는지, 왜 자발적이고 싶은지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종종 분해되고 파괴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서부터 참여하기가 시작된다.

 

 

상품이라는 사물 - 새로운 이미지의 생산

  그렇다면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면서 맺어야할 상품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주체’라는 이미지보다 상품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에 대한 고민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막연하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관점에서 상품 사물과의 대안적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여러 시도를 했다. 그들은 사물이 자본주의적 노예화로부터 해방되어 일상적 현실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야민은 이들의 실험을 두고 사물에 깃든 물질의 해방적 힘을 강조한다.

  슈타이얼 또한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의 문화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생산은 디지털 이미지를 하나의 물질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물질적 형태로서 이미지라는 사물의 특이성을 받아들여야 하며,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연결과 사물의 새로운 활용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슈타이얼은 사물의 새로운 활용인 “사물을 활성화시키키”란 사물이 현재 발화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를 언어로 발화하기 위해서는 사실주의보다 사물을 규정하는 사회적, 역사적, 물질적 관계를 바라보고 변형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물을 활성화시키기가 아마도 ‘목적’을 설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준다. 존버거가 말했듯이 “애초에 이미지란 것 자체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면 우리는 이후 이어질 <공산품 프로젝트>에서 사물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질문을 계속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길드다 스토어>에 우리의 맥락과 동떨어진 상품을 만들지 말자는 사소한 목표를 설정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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