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레의 인문약방 / 6회> 지르텍 주세요

둥글레
2019-12-0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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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레의 인문약방/6회]

 

  지르텍 주세요

 

 

  “그런데 왜 지르텍을 달라는데 다른 약을 권하는 거야?” 

  “아마도 같은 성분과 효능인데 가격이 저렴한 약이 있어서 그랬겠지. 지르텍은 팔아도 남는 거 하나도 없어!”

 

친구가 저런 질문을 하면 난 약사를 사기꾼이나 도둑놈처럼 보는 것 같아서 흥분한다. 지르텍을 비롯해 광고로 유명해진 브랜드 약들은 모두 사정이 같다. 광고 비용이 약 가격에 반영되어서 원가가 올라가 비싸게 들어온다. 게다가 이런 약들의 가격으로 약국을 비교하기 때문에 약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거의 마진 없이 판다. 

모든 광고가 그렇겠지만 약은 유난히 광고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건강은 언제나 다다익선 아닌가! 새로운 모델이 광고를 하면 여지없이 곧 그 약을 찾는다. 하지만 유명한 약이라고 해서 모두 다른 약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저렴하면서도 효과가 좋은 약은 많다. 이런 사정들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브랜드명으로 약을 찾는 사람에게 대체로 다른 약을 권하지 않는다. 다른 약을 권할 때 불신의 눈빛을 보내거나, 아예 ‘닥치고 달라는 대로 줘’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싫다. 어떨 땐 그 사람에게 더 맞는 약이 있어도 입을 다물 게 된다. 

이렇다 보니 약국에 들어와 몇 마디 하는 말에도 느낌이 온다. 내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쓸 것인가가 거의 자동으로 결정된다고나 할까? 하지만 몇 마디 말도 없이 입 다물고 약을 건넬 때,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찌꺼기가 남아 찜찜하다. ‘이렇게 줘도 되나’에 이은 죄책감이 나를 물고 늘어질 때도 있어 괴롭다. 약사로서의 윤리를 나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셀프 메디케이션’ 시대이다. 하지만 그 셀프가 진짜 셀프인가 의문이 든다. 셀프를 구성하는 것이 자율이 아니라 타율이라면? 브랜드에 충성하고, 의료 전문가에 맹신하고, 각종 매체에서 떠드는 정보와 신빙성이 없는 카더라 통신까지. 여기엔 약에 대한 오해와 상품 사회가 조장한 불신과 불통 그리고 무엇보다 몸의 소외가 있다. 

 

‘제네릭 의약품’을 아시나요?

말이 나온 김에 지르텍을 예를 들어 유명 브랜드 약과 그것을 대신해서 약사들이 권하는 약에 대해서 알아보자. 지르텍은 UCB라는 제약회사에서 개발하여 1987년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각종 알레르기 질환에 쓰이는 항히스타민제이다. 이 약에 대한 특허만료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특허 보호기간인 20년을 경과한) 2007년이었다. 특허가 풀리면 지르텍과 똑같은 성분의 약을 복제해서 다른 제약회사에서 만들어 팔 수 있게 된다. 이때 지르텍은 ‘오리지널 의약품’이라고 하고, 복제한 약을 ‘제네릭 의약품’이라고 한다. 

의약품을 지칭할 때는 브랜드명(상품명)이 있고 일반명(generic name)이 있다. 지르텍은 브랜드명이고 일반명은 지르텍의 성분명인 세티리진이다. 제네릭 의약품이라는 말속에는 브랜드 의약품과 같은 약효 성분을 가진 의약품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오리지널 의약품은 개발 시에 썼던 투자금을 감안하여 특허 보호 기간 중에는 높은 약가를 유지한 채 독점적으로 판매가 가능하다. 하지만 제네릭 의약품은 그러한 개발비 투자가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약을 생산할 수 있다.

의약품 외의 상품에서도 늘 대두되는 문제는 품질에 있어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의약품은 사람 목숨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 보건 당국은 제네릭 의약품의 생산・판매를 허가하는데 까다로운 절차와 기준을 가지고 있다. 약효 성분의 품질과 기준은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해야 한다. 특히 완제의약품1이 인체 내에서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는지 시험을 해야 하는데 이를 일컬어 ‘의약품동등성시험’2이라고 한다. 제네릭 의약품은 오리지널 의약품과 약효 성분이 동일하지만 제제를 만들 때 들어가는 첨가제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동등성시험은 필수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등성이 확보된, 같은 성분의 같은 제형 의약품들 간에 대체조제가 가능하다. 품질에 있어 두 약품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보면 된다. 

 

어떤 것이 좋은 약일까?

지르텍처럼 블럭버스터급 의약품은 관련 제네릭 의약품이 많다. 우리나라에서 허가된 지르텍 복제약은 약 50 종이나 된다. (제네릭 의약품이 500 종류가 넘는 경우도 있다.) 1정이 39원에서 210원까지 그 보험약가는 다양하다. 첫 번째로 허가를 받은 제네릭 의약품의 가격은 오리지널의 53.55%가 되고 오리지널 의약품의 가격은 70%로 떨어진다. 두 번째 이후 등재되는 제네릭 의약품들은 순서대로 더 낮은 가격을 책정받게 된다. 70%였던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은 1년이 지나면 한번 더 떨어져 첫 번째 제네릭 의약품 가격과 동일하게 된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같은 효과의 저렴한 약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도 환영할만한 일이다. 저렴하면서도 효과 있고 안전한 약을 쓰는 것은 건강보험 재정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각국 보건 당국은 제네릭 의약품 소비를 장려하고 있다. 처방을 성분명으로 발행하게 법으로 정한 국가들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오리지널 의약품을 살지 제네릭 의약품으로 살지는 환자에게 달려있다. 당연히 저렴한 제네릭 의약품이 훨씬 많이 선택된다. 

그렇다면 39원짜리 약이 가장 좋은 약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39원으로 제조단가를 맞추기가 어려워 허가는 받았지만 생산 판매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격이 좋은 원료 공급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광고를 하지 않는 등 원가를 개선해서 낮은 가격으로 생산 판매를 할 수도 있다. 몇 개의 제약회사들이 연합해서 제네릭 의약품 허가를 받는 경우는 약 이름만 다르지 그 속 내용은 똑같다. 어떨 때는 아주 유명한 제약회사가 제네릭 의약품 출시 경쟁에서 밀려나 낮은 약가를 받기도 하고, 듣보잡 제약회사가 이 경쟁에서 이겨 높은 약가를 받기도 한다. 듣보잡 제약회사라고 하지만 요사이엔 제약 기술에 있어서 아주 큰 차이는 없다. 보험약가로만 또는 제약회사의 유명세로만 약의 품질을 가늠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오리지널 의약품을 고수하겠다면 지금부터 할 얘기는 그 충성도에 일격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제네릭 의약품이 나오면 오리지널 의약품의 가격이 떨어지기 때문에 원가를 낮추기 위해 원료의약품을 아웃 소싱하는 하는 경우가 많다. 자체 생산으로는 가격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제약회사에 다닐 때 한 유명 오리지널 의약품 회사에 우리가 생산한 원료의약품을 공급하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원료의약품을 다른 제네릭 의약품 회사들에도 납품했기 때문에 이때의 오리지널 의약품과 제네릭 의약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오리지널 의약품 회사가 자회사를 만들어 제네릭 의약품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제약회사는 자신들의 강점을 살리는 생산보다는 의사의 처방권만 믿고 의사에게 리베이트를 주는 등의 영업에 열을 올려 판매하는 전략을 쓴다. 심하면 한 회사의 약들로만 구성된 처방전을 들고 오는데, 보통 흔하게 처방되는 약이 아닐 가능성이 많아서 약을 조제해 주기 힘들다. 이럴 때는 병원 근처 약국으로 가라고 돌려보낸다. 의사가 처방했다고 해서 다 좋은 약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제약 현실과 의료 환경에서 처방을 받든(전문의약품이든) 직접 구매를 하든(일반의약품이든) 좋은 약에 대한 확신은 어렵다. 유명세도 전문가도 보건당국도 좋은 약을 마냥 보장해주지 않는다. 의료의 전문성과 자본주의적 현실이 만들어 낸 정보의 비대칭성은 그 정도가 심한만큼 우리 몸에 너무 일방적이고 타성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약은 장땡이 아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의료의 권위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몸에 대한 앎을 쌓아가기가 힘들다. 또 과학의 신화는 의료나 약에도 신화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의사나 약사들 같은 의료 전문직들도 약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나 역시 조금만 아프면 주저 없이 가까이에 있는 약을 집어 먹었다. 의사들도 약 처방 없이 환자를 치료하기 힘들어한다. 한 의사가 쓴 글에서 의사들이 약을 처방하는 이유를 읽은 적이 있다. 환자들이 달라고 하기도 하고 약의 즉각적인 효과에 기대 환자를 흡족하게 하기 위해서 처방을 한다고 한다. 안 그러면 환자들은 즉각 다른 병원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또 약을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약을 당위로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처방내용도 과해지기 쉽고, 환자들도 약을 조금 주면 성에 차지 않아 한다. 예컨대 감기 처방은 주로 4~6 가지 알약으로 구성된다. 항생제, 진해제(기침약), 거담제(가래 제거), 해열진통제(또는 소염진통제), 항히스타민제(콧물약), 비충혈제거제(코막힘 제거), 위장약 등. 이 약들로 증상에 따라 처방이 구성이 된다. 열거한 대부분의 약들은 증상을 경감시키기 위한 약이지 원인을 치료하지 못한다.3 감기는 약을 먹으면 7일, 약을 먹지 않으면 1주일이란 말은 이를 풍자하고 있다. 약을 공부한 사람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많은 약을 동시에 복용하는 경우에 대한 임상실험은 된 적이 없다.

며칠 전 어떤 사람이 감기 처방을 가지고 왔는데 감기 처방 중에 있는 소염진통제가 정형외과에서 준 소염진통제와 겹치고 치과에서 준 소염진통제와 겹쳤다(요새는 같은 효능군의 약이 겹치면 약국 전산상으로 모두 체크가 된다). 어떤 약을 복용하고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약을 처방한 것인지, 환자가 아무 말도 안 했는지, 알고도 처방한 것인지, 한숨이 나온다. 그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약을 타다 집에 쌓아 놓고 있을 것이고 또 같은 효능의 약을 중복적으로 복용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난 감기약을 먹는 동안은 다른 두 처방의 약을 못 먹게 단도리를 했다. 

어떤 약이 좋은 약인지 따지기에 앞서 이렇게 약을 많이 복용하는 게 어떨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집에 약을 쌓아 놓고 걸핏하면 약을 삼키는데 내 몸에 대한 앎이 쌓여갈 수 없다. 어떨 때 두통이 생기는지, 무엇을 먹으면 탈이 나는지, 코가 막힐 때는 건조해서인지 등 내 몸에 생기는 여러 증상을 겪으면서 면역력이 생기고 몸에 대한 작은 앎들이 쌓여간다. 자신의 몸에 대한 앎이야말로 의료정보의 비대칭성에 대적할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한다. 이런 앎이 있어야 의료화 된 사회에서 휩쓸리지 않고 지혜롭게 그리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글의 서두에서 지르텍 팔아 남는 거 하나도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남는 약도 많다. 그러니 나의 볼멘소리는 좀 염치가 없는 말이다. 브랜드만 좋아하고 약사 말엔 귀를 막는 사람들을 아니꼽게 보지만, 내가 약국에서 약을 팔고 있다는 사실 즉 장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또 빠른 시간에 증상을 경감시키고 싶어 이 약에 저 약도 주고 싶어 하는 나도 있다. 상품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속도와 효율에 작동하는 내 몸은 내 몸만이 아니라 약국에 오는 사람들의 몸까지도 소외시키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르텍 주세요”에 “오천 원입니다”라는 단 두 마디로 끝나버리는 삭막함은 우리 모두의 무지와 무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 몸 역시 다른 앎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환자 자신의 몸에 대한 앎과 약사의 앎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되어 만나는 곳, 약국이 여러 앎들이 만나 충돌하고 또 소통하는 곳이면 좋겠다. 이런 상호작용의 결과로 약이 필요 없을 수도 있고 짧게 약을 써야 할 수도 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소한의 약으로 괜찮을 수도 있고 또 꼭 브랜드 약이 아니어도 괜찮은, 여러 가능성으로 치료와 치유가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몸과 약국을 바라본다.

 

주석)

1. 보통 ‘제제’라고 하며, 유효성분을 함유한 정제, 캡슐제, 좌제 등 실제로 투여되는 최종제품을 말한다.

2. 의약품동등성시험이란 그 주성분 ·함량 및 제형이 동일한 두 제제에 대한 의약품동등성을 입증하기 위해 실시하는 생물학적 동등성시험, 비교용출시험, 비교붕해등 기타시험의 생체내·외 시험을 말한다.

3. 감기는 바이러스 질환이나 매번 다른 바이러스에 맞는 항바이러스제를 생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감기의 원인 치료를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으로 볼 지 아니면 몸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으로 볼 지는 여러 의료 전통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글 :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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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탁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엄청 흔들렸다. 내 흔들림과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약방을 차려볼까 한다. 약학과 인문의역학이 버무려진 ‘인문약방’을!

댓글 4
  • 2019-12-12 09:21

    처방전 받아서 약국에 가면 다른 약 복용하는 거 있냐고 묻는 약사 없던데...앞으로는 셀프 보고를 해야겠어요.
    개인적으로 궁금한 거 있는데..향후 소재로 써주시길 요청!

    건강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건강보조제(비타민, 오메가3, 크릴오일 등등) 많이 먹는데, 잡히는 대로 먹어도 되는지..
    저는 이게 늘 궁금했어요. 비타민만 해도 종류가 수십가지인데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지, 또 꼭 먹어야 하는지도.

    전 귀찮아서 안먹는데 주변에 보면 열심히 챙겨 먹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구요.
    먹어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안먹는 것보다는 낫겠지..하면서 챙겨 먹는 걸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한번 풀어봐 주시길.

    • 2019-12-12 12:32

      넵! 영양제편 특별편성 들어갑니다~ ^^

  • 2019-12-20 16:21

    항생제 편도 부탁드려요~! ㅎㅎ

    • 2019-12-23 15:26

      헛! 애독자의 명령을 받자와 항생제 편도 편성하겠습니닷!

봄날의 주역이야기
주역은 점치는 책이다. 그런데 점치는 방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주역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주역은 점을 치는 책으로 인정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내용과 의미를 꼼꼼히 원리와 뜻을 따져가며 해석해서 읽어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원리를 따져가며 읽는 방식의 주역을 의리역(義理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점을 치면서도 그 해석을 의리적으로 하기도 하고 의리역으로서 주역을 읽으면서 수시로 점을 치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방식을 적절하게 취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수 있다. 가끔 혼자 혹은 함께 모여 시초점으로 괘를 뽑고 이것을 해석하는 재미가, 주역이 다른 텍스트와 구별되는 매력이 되기도 한다. 점을 쳐서 화수미제(火水未濟)괘를 얻었다고 치자. 그럼 나는 생각해본다. 나에게 왜 이 화수미제괘가 왔을까?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우선 이 괘가 길흉, 즉 좋은지 나쁜지를 먼저 따졌었다. 지금은 그것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떤 괘가 오든지 내내 좋기만 하든지, 내내 나쁘기만 한 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좋다고 환호하고 있을 때 막바지에 다가올 불운을 캐치해내지 못하는 것이, 나쁜 괘를 받아들고 심사숙고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욱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정(正)도 없고 응(應)도 기댈 바 없고 화수미제괘는 주역 64괘의 순서에서 마지막에 위치한 괘이다. 하나의 괘를 이루는 여섯 효는 음양의 배치에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첫 번째부터 여섯 번째 효의 자릿값의 순서는 양-음-양-음-양-음이다. 63번째 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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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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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우현 2024.04.09 |
조회 20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띠우 2024.03.31 |
조회 195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91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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