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인생극장/5회> 언중유향(言中有響), 각본 없는 드라마를 기대하며

기린
2019-11-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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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언제야?”

회의 할 수 있는 시간을 잡기 위해서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는 최종 결정단위가 따로 없다. 그래서 결정 사안이 생기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회의 시간부터 잡아야 한다. 그 사안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데, 한 번의 회의로 결정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혀 가는데 이게 쉽지 않다. 서로 오가는 말에서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감응이 일어날 리 없고 회의 시간은 점점 피곤해지기 일쑤다.

『사기』에도 수많은 대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조정에서 오가는 대화가 많은데, 이 때 빛을 발하는 것은 말 잘 하는 신하들의 활약이다. 물론 그 말들이 모두 나라의 안위를 위한 것은 아니다. 속사정을 따져보면 각자의 실리를 좇을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들은 장차 닥쳐올 파국을 막게 되는 결정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변화를 초래하는 감응의 대화, 어떤 말들이 오고갔던 것일까.

  1. 위왕과 순우곤의 대화

 

전국 시대 제(齊)나라 위왕(魏王)은 술을 좋아하여 밤새 술 마시기를 즐겨하는가 하면 나랏일은 나 몰라라 하는 위인이었다. 그러자 신하들도 그에 발맞춰 흥청망청하니 나라의 안위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형국이었다. 그런 어느 날 위왕이 순우곤이라는 신하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오고가는 잔에 술이 오른 왕은 순우곤에게 말했다.

-그대는 주량이 어찌 되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

-한 말을 마시고 취한다면서 어떻게 한 섬을 마신단 말이오?

순우곤이 대답했다.

-임금께서 내리신 술잔은 두렵고 어려운지라 엎드려 마시느라 한 말도 못 넘기고 취합니다. 어버이를 모시고 손님을 접대하는 술자리는 긴장하면서 마시느라 두 말 전에 취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마시는 술은 대여섯 말은 마실 수 있겠지요. 만약 고향 주막에서 남녀가 뒤섞여 투호놀이 등을 하며 술잔을 오가면 여덟 말쯤 마시도 취기가 돌뿐입니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 사람들이 돌아가니, 주인이 내 방에 얇은 비단 속옷을 입은 여인네라도 들여보낼라치면 신은 너무 즐거운 나머지 한 섬도 거뜬히 마십니다. 그러므로 ‘술이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고 즐거움이 극도에 이르면 슬퍼진다’ 고 하니 모든 일이 이와 같습니다. 지나치면 반드시 쇠합니다.

위왕은 순우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말했다.

-좋은 말이오

순우곤은 노예출신이라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임금의 술자리에 배석할 정도에 이른 것을 보면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바로 말솜씨였다. 사마천은 「골계열전」에서 위왕과 순우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골계’란 매끄러운 말로 웃음을 자아내는 일을 의미한다. 골(滑)자를 살펴보면 물(氵)과 뼈(骨)가 결합되어 있다. 순우곤의 말은 물처럼 매끄럽게 술 좋아하는 위왕의 마음에 흘러들었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러서 한 마디에 뼈를 심었다. 지나치면 반드시 쇠한다. 위왕이 무엇에 빠져있는지 정확하게 가리킨 이치, 그래서 위왕을 꼼짝 못하도록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그 후 위왕은 밤새워 술 마시는 일을 그만 두고 나랏일을 챙겼다. 순우곤에게는 제후들 사이의 외교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주연이 열릴 때마다 언제나 순우곤이 옆에서 모셨다.

 

    2.유방과 항우의 대화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가 다시 혼란에 빠지니 천하의 호걸들이 다시 일어났다. 그 중에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유방과 항우였다. 두 사람은 서로 기세를 다투며 다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막바지 각축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노약자들은 군량 운반에 지쳐갔고 장정들은 군 생활을 힘겨워했다. 두 사람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화의 장에 나왔다. 두 사람은 광무산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시작했다.

-유방은 들으라. 쥐새끼처럼 도망 다니지 말고 당당히 나서서 나와 일대일 대결로 결판을 내자!

-대역죄인 항우는 들으라! 회왕 앞에서 우리가 처음 명을 받았을 때 관중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되기로 했다! 그대는 약속을 저버리고 나를 촉한으로 몰아냈다! 또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약탈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저버리고 파괴했다! 사람을 보내 은밀하게 의제를 살해했다!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한 죄도 모자라 이미 항복한 자를 죽이고 정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지도 않으며 약속도 저버렸으니 천하가 용납하지 못할 대역무도한 죄인이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제후의 군대와 함께 천하의 대역죄인을 정벌하겠노라! 굳이 일대일로 도전할 까닭이 무엇인가!

유방이 쏟아내는 죄목에 화가 끝까지 치민 항우는 당장 숨겨놓은 쇠뇌를 꺼내어 장전했다. 서로 대화하기 위해 몇 사람의 장정이 목청을 돋우어야 하는 거리였다. 그 거리를 단숨에 좁힌 항우의 화살은 유방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유방은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허리를 굽혀 발을 문지르며 말했다.

-저 대역죄인이 내 발가락을 맞혔다!

유방의 진영에서 크게 비웃는 소리가 항우의 진영으로 울려 퍼졌다.

유방은 항우와의 대결에서 내내 약세였다. 항우와 일대일로 맞서면 당장 끝장이 나는 형국이었다. 유방이 내세운 죄목이란 것이 항우로서는 승복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항우 군대의 승리가 없었다면 제후연합군의 지금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유방이 보따리 내놓으라는 생짜를 쓰는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항우가 쇠뇌를 쏴 버렸다. 유방을 맞출 자신도 있었다. 유방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목숨을 내놓고 항우의 성질을 돋운 것이다. 화살을 맞은 충격을 무릅쓰고 허리를 굽혀 쇼를 하는 것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산을 뽑을 혈기 방장한 항우가 산전수전을 겪으며 경륜을 쌓은 유방의 노련함에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3. 주창과 유방의 대화

주창은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유방이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그도 함께 나섰다. 그 후 주창은 늘 유방의 뒤를 따르며 항우와 싸웠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 고조가 되었고, 주창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강직한 성품이라 바른 말을 하는 신하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고조가 척부인을 옆에 끼고 노닥이고 있는 형국에 주창이 들어섰다. 고조의 모습을 본 주창을 뒤돌아 물러났다. 고조가 뒤쫓아 와 서 그를 잡고 말했다.

-나는 어떤 임금이냐?

-폐하는 거얼...주와 다...으름 없는 폭군이십니다.

고조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주창을 내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흘러 고조는 자신이 아끼는 척부인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태자를 폐위시키려고 했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나섰지만 무시했다. 고조는 주창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신은 마..말은 자..알 못하지만 그..것이 오..옳지 않다는 것은 아..알고 있습니다. 신은 폐...하의 며..명려..령을 드듣..지 않겠..습니다.

워낙 중차대한 일에 격앙된 주창은 더더욱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고조는 그런 주창의 말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방이 고향의 주막에서 브아피 고객 노릇에 만족하며 살다 천하가 다시 재편되는 때를 만났고 사람이 달라졌다. 주창은 유방이 주막의 한량에서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서로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는 세월이었다. 그러니 노련한 유방이 강직한 주창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주창에게 물어본 것은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자라도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의 의중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짐작은 했으되 정직한 주창의 대답을 재확인하자 겸연쩍은 웃음으로 모면하는 유방이 눈에 선하다. 결국 유방은 태자 폐위 건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언중유향(言中有響), 말에는 울림이 있다. 순우곤은 왕의 심기를 살피면서도 꼭 해야 할 말은 놓치지 않는 기지가 돋보인다. 노련한 사람은 자신의 말로 인해 벌어질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진다. 유방은 항우를 자극한 후 목숨을 걸고 그 결과를 감당해냈다. 주창의 말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만큼 유방과의 믿음이 돈독하기도 했다. 믿음에는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 이렇게 세 사람의 말은 각각 상황은 달랐지만 상대에게 울림을 주어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회의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저들의 말처럼 드라마틱한 순간을 연출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사안에 대한 지난한 이해의 과정을 거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그조차도 소수의 사람이 계속 말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대략 난감이다. 나로 말하자면 어떤 때는 쓸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우물쭈물하다가 회의 시간을 다 보낸다. 혹은 상대와 다른 생각을 밝힌다고 말에 힘을 주다가 언성이 높아져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의에 갈 때 마다 언중유향의 순간을 기대한다. 각본 없는 드라마야말로 제대로 울림을 줄 테니까.

댓글 4
  • 2019-11-12 17:45

    부정적인 정념을 일으켜 사태를 악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울림이 있는 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울림이란 것이 혀끝에서의 말재간이나 기술로서의 수사학이나 웅변술만으로는 안될 것이 분명할 터.
    골계도 노련함도 도무지 역부족인지라, 차라리 주창의 '말 더듬기'를 배우고 싶군요.

  • 2019-11-14 15:10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해서 상대를 설득하거나 속이거나 할까?엔
    정말 말 잘하는 기술이 필요할겁니다.
    미사여구가 필요없는 신뢰가 쌓이는 관계가 먼저인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에는 말 더듬이의 향기도 맡을 수 있는 코가 아닌 귀가 있는 것 아닐까요?

  • 2019-11-14 21:28

    순우곤도 대단하군요. 필요한 말, 하고싶은 말을 위해, 잘골라내는 솜씨라니, 전 거기 가기 전에 상대방 화를 먼저 돋우기 일쑤라서...

  • 2019-11-14 23:06

    언중유향에서 향은 깊은 신뢰가 아닐까.,.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세 번째 영화는 <아들>(2002)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차례 아들 Le Fils | 드라마/미스터리 | 벨기에, 프랑스 | 102분 | 2002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인 ‘인트로’는 그 영화의 첫인상이자 분위기를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2002)은 음악도 없이 흔들리는 어떤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 위로 건조하게 제작자, 주연배우, 감독의 이름 등이 보였다 사라진다. 마치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이 생각나는 ‘인트로’를 보고 있으니 ‘아, 이번 영화도 뭔가 쉽지는 않겠구나’는 느낌이 팍팍 든다. 다르덴 형제의 이름과 영화의 원어제목 ‘Le Fils’이 사라지면, 카메라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 흔들리는 ‘형상’이 바로 ‘올리비에’(올리비에 구르메, 배우의 이름을 그대로 등장인물 이름으로 사용했다)의 ‘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인트로’처럼 영화는 대부분 올리비에의 ‘등과 뒷모습’을 시종일관 따라다닐 거라고 미리 알려주고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혹독한 수준의 리허설로 유명하다. 이유는 영화가 배우들의 ‘몸’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동선을 구성해보고,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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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4.14 |
조회 116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바닷가를 향하며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리뷰     사회학자-테크트리?  올해 내가 참여하는 세미나 중 하나로 사회학 세미나가 꾸려졌다. 이 세미나는 나를 장래의 ‘사회학 세미나의 튜터’로 키우겠다는 정군샘의 포부와 함께 만들어졌다. “사회학?” 정군샘은 평소 나의 글을 보며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하셨지만, 난 사실 ‘사회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낯설다. 내가 평소에 사회 문제나 이슈를 다룬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사회학’이라는 학문으로 연결되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애초에 ‘사회학’이라는 말의 범주는 너무 넓은 게 아닐까? 하물며 ‘사회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전공을 ‘사회학’으로 삼을만한 동기나 마음이 나에게 있을까? 이런 나의 상태를 간파했다는 듯이, 정군샘은 독서가 테크트리의 다음 책으로 『사회학의 쓸모』를 추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대담을 편찬한 책이다. 바우만은 나에게 사회학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사회학이 뭔데?  ‘사회학’이 뭘까? 바우만은 서론에서부터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정의되기 힘든 점을 짚어주고 있는데, “사회학은 그 자체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인 ‘사회세계’social world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4) 다른 대부분의 학문은 학문과 연구의 대상을 분리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화학을 연구하는 건 ‘화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전문 지식을 발휘해야만 한다. 일반인들은 ‘화학의 세계’를 살아갈 일이 많지 않으며, 그 세계는 전문 학자들의 영역으로 남는다. 반면 ‘사회세계’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가는 공간이고, 딱히 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사회학은 ‘과학’과 같은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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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2024.04.09 |
조회 18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파괴가 곧 창조다 리처드 켈리의 <도니 다코 Donnie Darko/2001>     중2는 미국에도 있더라   영화는 해가 뜰 무렵, 어스름한 산길 위에 누워있던 도니 다코(제이크 질헨할)가 잠에서 깨면서 시작되었다. 일어나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한 도니의 입가에 비치는 사악한(?) 미소의 의미는 후반부에 가면 알게 된다. 경쾌한 음악에 맞춰 자전거로 아침 햇살을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도니, 냉장고 앞에는 ‘Where is Donnie?’란 메모판이 붙어 있다. 아, 이렇게 도니가 아침에 나타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나 또 살았구나~   영화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간을 환기한다. 우선 1988년 10월 2일이다. 역사적으로 1988년 11월 8일은 미국 대선 날이다.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 마이클 듀카키스가 맞붙었고,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도니의 가족들도 대선에 관심이 많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를 통해 이 가족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부모 세대는 은연중에 부시를, 큰딸 엘리자베스는 공개적으로 듀카키스를 지지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 차이는 당연지사.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중2병에 걸린 자식은 여기도 있다. 도니는 매사 부모, 누나, 동생, 선생, 친구 모두와 부딪힌다.   10대 청소년인 도니가 정신병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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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3.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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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동은 2024.03.26 |
조회 170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53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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