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레의 인문약방 / 5회> 달콤살벌한 다이어트

둥글레
2019-10-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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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레의 인문약방/5회]

 

달콤살벌한 다이어트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약국이 한가하다. 감기나 알레르기 질환들이 뜸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약국은 사정이 좀 다르다. 노인 환자들이 많아서 늘 복용해야 하는 만성질환에 대한 처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여름이 되자 약국으로 일명 ‘다이어트 처방’이 몰려들었다. 다이어트 처방은 계절에 상관없이 늘 있지만 노출이 많은 여름이 되면 당연히 더 늘어난다. 근무약사 입장에서는 이 처방을 가져오는 손님들이 달갑지는 않다. 처방 일수가 길고 약 가짓수가 많아서 조제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또 약을 먹으면서까지 살을 빼려는 그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다이어트 처방은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원칙적으로는 진료과에 상관없이 발행이 가능하다. 여러 약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거의 다이어트 처방을 조제했다.

 

소름 끼치는 다이어트 처방

다이어트로 허가를 받은 약은 식욕억제제와 지방흡수(소화) 억제제로 크게 두 가지다. 하지만 처방을 보면 약 종류가 5가지가 넘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떤 병원에서 처방했건 이 처방들은 마치 복사라도 한 듯이 비슷하다. 위 두 가지 약 이외에 간질 치료제, 우울증 치료제, 각성제, 당뇨약, 비충혈 제거제(감기로 인한 코막힘 치료), 변비약, 이뇨제, 유산균 제제, 녹차추출물 등이 추가된다. 여기에 알약으로 나오는 한방 제제(방풍통성산이라는 처방)까지 쓰인다. 약사로서 처방 내용을 보면 소름이 절로 끼친다. 약들의 작용과 부작용을 알게 되면 과연 복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지방 섭취가 많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주로 식욕억제제인 암페타민류(펜터민, 펜디메트라진, 디에틸프로피온, 마진돌)가 처방된다. 이 약들은 일명 히로뽕으로 알려진 마약, 메스암페타민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히로뽕처럼 작용과 부작용이 중추신경계에 전방위적이지는 않지만, 뇌에서 신경전달물질인 에피네프린이나 도파민의 분비를 증가시켜 교감신경을 흥분시킨다. 교감신경이 흥분된 상태는 싸울 때의 상태와 비슷해서 정신이 흥분되고 식욕이 떨어지며 에너지를 바로 사용하기 위해 신진대사도 빨라진다. 비교적 최근 허가를 받은 벨빅®(로카세린)은 암페타민류와 비슷한 작용과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에 나온 콘트라브®(날트렉손과 부프로피온)와 삭센다펜®(리라글루티드)도 포만중추에 작용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은 편이다.
토피라메이트 성분의 간질약은 식욕억제 효과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펜터민이라는 식욕억제제와 복합제(큐시미아®)로 미국에서 승인되었다. 단독으로는 다이어트에 사용되지 않는다. 우울증 치료제인 플루옥세틴(대표 브랜드는 프로작®)은 뇌에서 세로토닌이 재흡수되는 것을 막아 기분을 좋게 하고 식욕도 억제한다. 우울증 치료제는 식욕 억제제와 함께 복용했을 때 교감 신경을 너무 과도하게 흥분시키기 때문에 병용이 권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실상은 거의 같이 처방되고 있어서 심히 걱정스럽다. 메트폴민이라는 당뇨약 또한 식욕 억제에 대한 기전이 밝혀지지 않았다. 슈도에페드린은 교감신경을 자극해 코 혈관을 수축시켜 코막힘의 증상을 없앤다. 감기약을 먹으면 입이 마르고 밥맛이 없어진다고 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이다. 변비약은 설사를 시켜, 이뇨제는 몸 안의 수분을 더 빼내서 체중을 줄이는 효과를 가진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대부분의 식욕억제제들은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의존성과 중독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부작용을 일으킨다. 기분의 변화가 크고 예민해지는데 심하면 망상이나 환각 그리고 드물지만 조현병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 약물을 복용하다 끊었을 때 상대적으로 졸리고, 집중력이 저하되고, 우울감이나 짜증, 피로나 불쾌감이 생기고 식욕이 증가하여 체중이 늘 수 있다. 매스컴에 식욕억제제를 먹고 정신 이상을 보이거나 중독된 경우가 가끔 나오기도 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펜터민이나 로카세린은 유럽에서 판매가 중지되었다. 여기에 병용 투약에 대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약물들도 같이 처방되고 있어서 어떤 부작용이 발현될지 짐작하기 힘들다.

 

‘정상 체중’라는 신화
다이어트 처방 내용을 보며 놀라고 한 숨을 쉬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처방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전혀 뚱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엔 그냥 보통이다. 한 손님에게는 살도 안 쪘는데 왜 다이어트 처방을 받아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중요한 모임에 가기 전에 부기를 쫙 빼고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분은 추석 때 일가친척을 만나는데 예쁘게 보이고 싶다고 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들이다.
이렇게까지 살을 빼야 할까? 혀를 차며 그들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에서는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약의 부작용을 알기 때문에 약으로 살을 뺄 생각을 안 할 뿐이다. 이 날씬해지고 싶은 욕망은 뷰티 담론과 연결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강력하게 이 욕망을 지지하는 것은 건강 담론이다. 왜 살을 빼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예뻐 보이고 싶다는 말에 앞서 비만은 질병이다!라는 답을 준비하고 있다. 의학이, 과학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만은 전염병 취급을 받고 있다. 고혈압, 당뇨병, 기타 심혈관계 질환 등 많은 질병들이 비만에서 기원한다는 ‘비만 만병설’이 현재 주류 의학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일반인들도 체지방률을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비만을 판정하기 위한 기준은 체질량 지수(BMI; Body Mass Index)이다. BMI는 체중(kg)을 신장(m)의 제곱으로 나눈 값으로, 세계보건기구는 BMI 10~24는 정상, 25~29는 과체중, 30 이상은 비만으로 분류한다. 대한비만학회 기준은 이보다 엄격해서 23 이상은 과체중, 25 이상은 비만이다. BMI의 가장 큰 약점은 상대적으로 근육이 많아도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체지방률이나 허리둘레에 대한 정상 수치가 추가적으로 제시되어 있다.1

현재 내 상태를 위에서 제시한 수치로 평가해 보자. 아침을 먹고 난 후 쟀더니 체지방률이 30%, BMI는 23.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또 어떤 수치로 평가하느냐에 따라, 나는 정상, 과체중 또는 비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보는 누구도 나를 뚱뚱하다거나 통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만 관련 질환을 앓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예전의 나 같으면 스스로를 ‘비만’이라고 엄격하게 판단했을 것이다. 비만 관련 질환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날씬하지 않아서 예쁘지 않다고 내 몸을 부정했을 것이다.
정말 난 건강하지 않은 것일까? 그런데 ‘비만 패러독스(weight paradox)2’라는 말도 있다. 쉽게 말해서 심근경색, 신장병, 뇌졸중, 제2형 당뇨병 등을 앓고 있는 비만인 사람이 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날씬한 사람보다 생존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발표한 연구는 생각보다 많다. 『왜, 살은 다시 찌는가?』(와이즈북, 2016)에서 린다 베이컨은 다수의 저명한 논문들을 인용하여, 과체중인 사람들이 정상 체중인 사람들만큼 오래 살거나, 오히려 더 오래 사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한다.
과학은 늘 어떤 수치로써 타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이 제시한 수치는 언제나 어떤 확률이고, 그 확률이 배제한 수치에도 진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과학적 수치라는 것이 조작될 수도 있다면 어떻게 할까? 확률을 벗어난 곳에 내 진실이 있다면? 과학이 신화가 되어 버린 현재의 세상에서 과학이 말하는 ‘정상’도 신화가 되어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체질량지수 기준을 앞서 말했다. 이 기준은 국제비만대책위원회의 주도로 작성된 보고서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보고서의 근거 자료는 없었고, 이 위원회는 상당한 예산을 다이어트 약를 제조 판매하는 제약회사들(로슈와 애보트)로부터 받고 있었다. 사실상 공중 보건 정책을 민간 기업들이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린다 베이컨은 앞의 책에서 고발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정상 체중도 역시 만들어진 신화라는 것이다.

 

 

문제는 살이 아니라 감정이다
‘비만 만병설’과 ‘비만 패러독스’, 어느 쪽 과학이 맞는지 팩트체크라도 해야 할까? 요사이 자기 쪽이 팩트라고 온 나라가 갈라져 아우성치고 있어서 솔직히 팩트라는 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팩트라는 것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닐까? 어쨌건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인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맹신한 것이 사실이다. 맹신은 미신과 같고 그러한 미신은 우리의 공포심을 먹고 큰다. 뚱뚱해지면 큰 병이 걸릴 것이라는 공포심이 날씬하지 않은 자신의 몸에 부정적인 시선을 던지게 한다. 나는 이런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과학들이 말하는 내용에 더 귀를 기울이고 싶다. 적어도 이 과학들이 자기부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몸에 집중하자고 말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은 ‘다이어트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린다 베이컨은 우리 몸이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공한 다이어트는 거의 없다고 한다. 또 『다이어트의 배신』(에코 리브르, 2013)에서 아힘 페터스는 다이어트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인체의 기본적 자연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식량 부족은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되어 뇌에 엄청난 부담을 주게 된다.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어 신체는 심각한 부작용3을 겪게 되므로 살려면 다시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린다 베이컨, 아힘 페터스 등 과체중이나 비만을 질병으로 분류하기를 거부하는 과학자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살을 일부러 찌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비만이 원인이 된 질병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이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나 의지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에 비해 뚱뚱한 사람이 늘어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연히 식량이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영향도 또한 크다.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액상 과당이나 트랜스 지방은 많이 먹어도 포만감을 잘 느끼지 못한다. 다른 식품들에 비해 이것들은 지방세포에서 분비하는 포만 호르몬인 렙틴을 분비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또 먹으면서 티브이를 보는 등 다른 일을 동시에 해도 먹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포만감을 느끼기 전에 많이 먹게 된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먹는 게 가장 큰 이유이다. 장기적으로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지만, 먹는 것은 즉각적인 위로가 된다. 스트레스와 체중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아힘 페터스의 의견은 이렇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의해 우리의 의식은 ‘깨어있는 일반적인 상태’가 없어지고 ‘지나친 각성 상태’와 ‘수면 상태’로만 존재하게 된다. 중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일과 음식 섭취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고 일상이 수면과 일종의 끊임없는 ‘작업 중 식사’로만 점철된다. 그렇게 하여 체중은 늘어난다. 실제로 그는 미국 같은 수입격차가 심한 사회에서는 비만률이 높다고 연구결과를 인용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체중 증가는 장기적인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뇌가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려는 생존 전략이다.4 그런데 다이어트로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따라서 스트레스로 인한 감정 조절이 관건이다.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로 치닫는 부의 불평등과 불확실성이 만연한 사회에서 경제적 하위 계층은 더 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게다가 ‘뚱뚱한 사람’들을 의지박약의 인간 실패 정도로 여기는 인권 감수성은 그들에게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간다.
성취 일변도로 살아온 나 또한 늘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온 것 같다. 돌이켜보면 깨어 있을 때는 항상 ‘작업 중 식사’인 의식 상태였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는 채 입속으로 구겨 넣었던 음식들, 내 몸에 필수인데도 눈을 흘겼던 체지방, 뚱뚱한 사람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본 내 시선, 효율성을 추구했던 멀티태스킹,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작정 따랐던 건강 욕망 속에 나의 무지함이 있었다. 무엇보다 감정에 대한 무지함이.
감정이나 욕망이 외부의 영향으로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는 늘 외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건 감정은 내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며 살지 아니면 감정을 인식하며 살지는 내가 결정한다. 내 감정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당장 해결할 수는 없지만 일단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앎들이 내 몸에 대한 앎과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반사적 반응이 아닌 앎에서 나온 나의 윤리들로 일상을 채울 수 있다면 좋겠다.

 

에필로그 - 근 한 달 동안 내 식욕을 찬찬히 살펴봤다. 하루에 두 번만 식사를 한다거나, 저녁 몇 시 이후에는 먹지 않겠다거나, 식품의 질을 따진다거나 등 그동안 고수했던 식습관에 너무 구애됨 없이 편안하게 먹고 싶을 때 먹었다. 먹을 때는 다른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최대 허용치는 라디오를 듣는 것이었다. 그래도 라디오 내용을 따라가면 맛을 알 수 없었다. 먹을 때에 먹는 것에 집중하자! 이것은 명상과 다른 게 아니었다. 그동안 멍한 채로 먹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내 식욕은 조금 줄었고 체중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주석)

1. 대한비만학회에서 제시한 기준이다. 허리둘레가 성인 남자에서는 90cm 이상, 여자에서는 85cm이상일 때 복부비만으로 진단. 체지방률은 남성은 25% 이상 여성은 30% 이상인 경우 비만으로 진단.

2. 미국 뉴올리언스에 있는 옥스너 의료원의 칼 J. 라비 박사가 과도한 지방은 심장질환의 발병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증상 악화를 억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명명한 현상.

3. 코르티솔은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스테로이드 구조를 가지고 있어 스테로이드 약과 같은 부작용을 가진다. 뇌 신진대사의 부조화, 우울증, 불면, 뇌 활동저하, 배고픔, 피부가 얇아지고 생식력 저하, 근육감퇴와 골흡수로 골다공증이 발생한다.

4. 아힘 페터스는 지속적 스트레스에도 살이 찌지 않는 유형의 사람들이 건강에 이상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들의 뇌는 몸의 다른 부위에 지방이나 단백질을 깨서 에너지를 공급받기 때문에 살은 찌지 않는다. 하지만 뇌가 스트레스를 습관화하는 것에 실패하여 코르티솔 호르몬이 지속적으로 분비되어 건강을 위협한다.

 

 

 

        글 :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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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탁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엄청 흔들렸다. 내 흔들림과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약방을 차려볼까 한다. 약학과 인문의역학이 버무려진 ‘인문약방’을!

 

 

댓글 5
  • 2019-10-21 10:55

    마지막 단락이..흥미롭군요.
    그런데....그럼 고독한 미식가가 되어야 하는건가? 문탁에서는 함께 먹는 즐거움을 이야기하잖아? 그럼 우린 맛을 모르는건가? ㅋㅋㅋ...이런 쓰잘데 없는 생각이 드네요.....ㅎㅎㅎ

    • 2019-10-21 20:59

      요새는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해도 TV를 보면서 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건 정말 지양해야 할 것 같구요..
      동의보감에서는 먹으면서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대화하면서 먹는 것은 이미 우리 문화가 되었기 때문에
      묵언하면서 함께 먹는 것은 템플 스테이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요? ^^
      그래서 도담샘의 책에서는 말하는 것과 먹는 것의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천천히 먹는 게 좋다고 합니다.
      에필로그에 나온 내용은 혼자 먹을 때를 말한 거구요
      문탁에서 친구들과 먹을 때도 더 천천히 먹게 된 것 같습니다~.

  • 2019-10-21 10:57

    야식을 먹는 대부분의 이유도,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이놈의 야근을 왜 하고 앉아있는거냐'는 불만의 대상으로
    야식을 섭취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영화를 볼 때 팝콘은 왜 먹는거냐?
    이건 당연히 상술에 넘어간 나의 미각일테고,

    그럼 우리가 밥상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은?
    사실 밥맛 보다는 사람맛으로 먹는 듯하다.
    라디오의 내용에 따라가다보면 밥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캔들 파지사유처럼 캔들 다이닝은 어떨까?

  • 2019-10-21 11:07

    밥을 먹을 때 무언가 틀어져있지 않으면 허전할 정도..
    음식에 집중하는게 참 어렵네요!

  • 2019-10-21 11:52

    요즘 새벽에 깨서 잠 못들어 하루종일 각성상태라 에너지 소모량이 증가하여 살이라도 빠지려나 기대했는데......

    어제 누군가 나에게 살이 더 찐것 같다라고해서 충격받았는데......

    지나친 각성상태로 맛도 모르고, 양도 모르고 먹었다는 건가요?ㅠㅠ
    아니면, 수면상태였나? ㅎㅎ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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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49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5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29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5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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