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인생극장 / 4회> 도행역시(倒行逆施), 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소!

기린
2019-09-30 15:19
521

 도행역시(倒行逆施)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의 인물인 오자서가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하면서 나온 말이다. 그는 부모형제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잊지 않고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원수의 시신을 훼손하기에 이르렀다. 무덤까지 파헤치며 사람이라면 차마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말았다. 그는 어떤 연유로 그 선을 넘었을까? 선을 넘어선 복수란 과연 무엇일까?

 

  1. 무덤을 파헤친 오자서

 

임금을 받드는 신하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바른 말(諫言)을 하는 신하와 아첨하는 말(讒言)을 하는 신하이다. 초(楚)나라 평왕에게도 두 부류가 다 있었다. 비무기는 아첨형이었다. 어느 날, 평왕이 비무기에게 진(秦)나라로 가서 태자의 아내를 맞아 오라는 임무를 내렸다. 비무기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 진나라의 공주가 미인이라는 정보도 입수했다. 임무 수행 길에 올랐던 말머리를 돌려 평왕 앞에 다시 섰다.

 

-소신이 알아보니 진나라의 공주는 빼어난 미인이라 합니다. 며느리로 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왕비로 맞이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아내를 얻어주십시오.

 

평왕으로 말하자면 미인을 마다할 인물은 아니었다. 당장 비무기의 참언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비무기는 임금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평왕이 하루아침에 죽고 태자가 즉위하게 되는 위험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비무기는 태자에 대한 비방의 강도를 점점 높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고해 바쳤다. 그 말을 믿은 평왕은 태자의 사부인 오사를 불러 추궁했다. 간언형인 오사는 강직하게 말했다.

 

-임금께서는 아첨을 일삼는 하찮은 신하 때문에 어찌 골육 같은 자식을 멀리하려고 하십니까?

 

비무기는 그런 오사가 아니꼬워 두 사람을 싸잡아 반란세력이라고 고했다. 화가 난 평왕은 오사는 감옥에 가두었고, 태자에게는 사람을 보내 죽이라고 명했다. 태자는 한발 앞서 그 명령을 접하고 도망갔다. 비무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인질로 잡아 그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초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평왕은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사의 두 아들은 조정으로 들라. 너희가 오면 네 아비를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

 

큰 아들 오상이 조정으로 나서려 하자 둘째 아들 오자서가 말렸다. 그 길은 세 사람이 모두 죽게 되는 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다음을 기약하고 달아나자고 했다. 오상이 말했다.

 

-너는 달아 나거라. 살아서 이 원수를 꼭 갚아다오. 나는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서 죽음을 맞이하겠다.

 

오자서는 스스로 잡혀가는 형을 뒤로 하고 사자에게 화살을 쏘며 도망쳤다. 갖은 고생 끝에 오(吳)나라에 들어간 그는 수완을 발휘하여 오나라 조정에 줄을 대었다. 그리고 초나라를 공격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제대로 초나라를 공격하니 초나라에서 도망친 지 십 육여 년이 흘러 평왕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소왕이 즉위한 후였다. 오나라의 공격에 소왕은 수도에서 달아났다.

 

 

그는 소왕이 도망쳤다는 소식에 평왕의 무덤을 찾았다. 장례를 치른 지 십 년이 넘은 무덤을 파헤치고 평왕의 시신을 향해 매를 휘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옛 친구 신포서가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자네의 복수는 너무 지나친 것 같네. 일찍이 신하가 되어 평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보이니, 이보다 천리에 어긋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자서는 이렇게 응답했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어 천리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전해 주시오.

 

2. 저무는 복수의 시간 앞에서

 

오자서는 십 육년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수는 무덤 속에 있었다. 원수의 아들(초 소왕)을 몰아내고 초나라 수도를 점령한 것으로 원한은 갚은 셈이다. 하지만 오자서는 무덤까지 파헤치고 시신을 훼손하니 신포서가 지나치다고 할 만하다.

 

오자서가 아버지를 따라 죽으러 가는 형과 한 약속, 꼭 복수하겠다고 다짐한 이후 십육 년은 긴 시간이었다. 도망 길에서 병에 걸려 죽을 뻔도 했다. 너무 배가 고팠을 때는 구걸을 해야 했다. 오나라에서는 왕권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왕좌를 차지하는 쪽에 줄을 대기 위해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는 나날이었다. 초야에서 농사일로 연명하며 언제 올지 모르는 때를 기다리는 시간도 있었다.

 

그 세월을 견디고 마침내 초나라 수도에 이르렀지만 한 발 늦었다. 도망간 초 소왕을 잡기 위해 주변국을 수색하는데 더 이상 시간을 쓸 수 없다. 오왕 합려가 아무리 그를 신임하더라도 한낱 신하의 사정에 맞춰 한정 없이 기다려 주지도 않을 것이다. 무덤 앞에 선 오자서는 자신의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는 복수의 시간이 느껴졌다. 이대로 돌아선다면 부모형제가 억울하게 죽은 사연은 잊히고 말 것이다. 그는 회초리를 들어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신에 매질을 시작했다. 「오자서열전」에는 삼백 번을 휘두르고서야 멈추었다고 적혀있다.

 

사마천은 오자서의 선택에 대해 “작은 의(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은 강인한 대장부”였다고 평했다. 신하의 도리를 지키기에 아버지와 형의 억울함이 더 무거웠다. 군신 간의 의리보다 부자간의 정이 더 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 정을 뒤로하고 도망쳐야 했던 치욕은 더욱 생생했다. 그것을 갚지 않고는 남은 생을 감당할 수 없는 절실함. 도리를 어기더라도 끝내야 했다. 그래서 오자서의 복수에는 계속 살아가기 위해 끝내야하는 부득이함이 느껴진다. 그 부득이함은 차마 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서야 복수를 끝내게 했다. 사마천이 강인하다고 여긴 지점이기도 할 것이다.

 

3.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오나라로 돌아온 오자서는 합려를 도와 오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서쪽으로는 초나라와 접전하고 북쪽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위협하고, 남쪽으로는 월(越)나라를 굴복시켰다. 그 와중에 월나라와의 접전에서 합려가 전사했고 그의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올랐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력을 키웠고 마침내 월나라의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자서는 월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화친을 맺으려는 부차에게 제동을 걸었다.

 

 

-지금이 월나라를 완전히 정복할 시기입니다. 화친은 월나라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뿐입니다. 월나라 왕 구천을 우습게보면 안 됩니다. 그는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는 인물입니다.

 

 승리에 도취한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 백비는 화친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에도 부차는 주변국과 전쟁에 나가면서 월나라는 안중에 없었다. 오자서는 그 때마다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부차는 그런 오자서가 불편했다. 왕의 심기를 눈치 챈 백비는 이렇게 참소했다.

 

-오자서는 불만이 많으니 결국은 주변 제후들과 공모하여 쳐들어 올 것입니다. 그전에 오자서를 처리해야 합니다.

 

부차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자서에게 칼을 내리며 자결할 것을 명령했다.

 

 

-아첨과 비방을 일삼은 신하의 말로 나에게 칼을 내리다니! 제 아비와 저를 왕으로 만든 나의 공이 한낱 신하의 아첨에 무너진단 말인가. 내 죽어서도 오나라의 멸망을 똑똑히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으면 눈알을 도려내어 오나라 동문에 걸어다오.

오자서의 마지막 말을 전해들은 부차는 대노했다. 오자서의 시신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말가죽에 쌓여서 강에 버려졌다.

 

 신하는 임금이 잘못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보필하는 자리이다. 아버지가 죽어나간 자리이기도 했다. 오자서 또한 그 자리에 서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버지의 불행을 본보기 삼아 자식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오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바른 길을 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자의 시신을 훼손하는 작은 도리는 어겼을지언정, 신하로써 바른 길을 가는 강인한 대장부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오자서가 죽은 이후, 때를 기다렸던 월나라 구천이 공격을 감행했고 오나라는 패배했다. 이 패배는 결국 오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오자서의 예언이 현실이 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던 아들이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회사에서는 작업 과정에서 생긴 재해로 처리하려고 했다. 부모가 보기에 그 재해는 안전을 무시한 온갖 불법이 묵인되는 현장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 불법을 가리기 위해 사고 무마에 급급한 회사에 맞서 부모는 아들의 장례를 거부했다. 사고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아들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관심이 쏠렸다. 대통령이 위로의 면담을 제안했을 때도 거부했다. 이러한 처사를 두고 항간에서는 자식 장례도 치르지 않는 독한 사람들이라고 수근 댔다. 면담을 거절한 것은 보상금 흥정이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그런 수모를 견디면서 싸운 끝에 아들의 장례를 치른 것은 아들이 죽은 후 육십 이일만 이었다고 한다. 고 김용균씨의 가족 김미숙씨의 이야기이다.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도리를 어기는 한이 있어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선을 넘어서서야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이후 김미숙씨는 ‘다시는’(산업재해 유가족 연대모임)에서 아들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연대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가족의 억울한 죽음에 주저앉지 않고 그런 세상을 바꾸는 일에 나서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오자서를 넘어 진정한 ‘복수’의 길을 내는 사람들이다.

댓글 2
  • 2019-09-30 16:27

    다시 더워진 날씨에 정신이 혼미했는데 서늘함을 주는 글이네요!!

  • 2019-10-08 09:48

    선을 넘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선이라는 것도 정해진 것이 아닐거구...
    선만 보지말고 사람을 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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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4.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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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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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4.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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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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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우 2024.0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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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29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5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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