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레의 인문약방 / 4회> 수면제와 네모창

둥글레
2019-09-02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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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레의 인문약방/4회]

 

수면제와 네모창

 

강박과 수면제

5월부터 새로운 약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근심이 하나 생겼다. 이 약국은 오래된 의원 옆에 있어서 노인 환자들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방문하는 노인들 중 반 이상이 수면제 처방을 받아 온다. 약사 인생에서 요즘 수면제를 가장 많이 조제 투약하고 있는 것 같다.

수면제는 ‘향정신성의약품’(이후 향정)¹으로 분류되고 마약과 같은 법률로 관리된다. 향정을 오남용 하면 정신적, 신체적으로 의존성이 생기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의료기관에서는 향정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하고 국가기관에서는 의료기관을 불시에 감사한다. 감사가 오든 안 오든 약국에서는 향정 개수를 세서 관리하고 그 조제 내역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보고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향정을 취급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손쉽게 수면제를 처방받고 있다니! 나는 놀랬다. 물론 수면제는 작용시간이 짧고 부작용을 줄였기 때문에 다른 향정에 비해 안전하다. 그래도 장기간 복용했을 때의 부작용²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정도면 수면제 처방을 남발하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나? 특히 약물대사 능력이 떨어지는 노인들이 이렇게 일상적으로 수면제를 먹어도 괜찮을까? 최근 살인 사건이나 성폭행 사건에 수면제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만큼 수면제를 구하기 쉬워진 것 때문일까? 걱정스러웠다.

 

 

수면제를 받아 가는 노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며 알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노인들이 수면 장애에 대해 강박을 느끼고 있었다. 흔히 말하길, 나이가 들면 잠이 준다고 한다. 동양 의학에서 볼 때, 노쇠로 인해 정기가 줄면 혈도 준다. 거기에 따라 잠도 자연스럽게 준다. 노인이 되면 활동량이 줄기 때문에 에너지가 덜 필요하니 기나 혈이 줄어드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인이 하루 5~6시간 정도 수면을 하고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잠이 준 것을 큰 병으로 여기고 굉장히 괴로워한다. 통 못 자니 낮에도 힘들고 피곤하다고 호소한다. 한 시간밖에 못 잔다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 더 얘기해보니 좀 과장이었다. 최대한 자정 정도까지 잠을 참았다가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든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일찍 자게 되면 중간에 깨고, 깨고 나면 잠들기 어렵다고 말이다. 또 어떤 분은 수면제에 술까지 마신다고 하였다. 술도 수면제처럼 중추신경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수면제 부작용을 키워 위험할 수 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지만 어쩔지 걱정이다.

특별한 일거리도 없고 질병이나 노화로 노인들은 낮동안 움직일 일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면 낮잠을 자기 쉽다. 그러면 밤에 잠이 더 안 온다. 밤에 잠을 못 자니 낮에 더욱 졸린다. 악순환이다. 또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통해서 노인들도 건강 정보를 넘치게 접하고 있다. ‘보통 성인이라면 하루 7~8시간이 적정한 수면시간이다’라고 다들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이하로 잠을 자게 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걱정이 많다.

 

수면 장애 = 불면증?

수면 장애를 겪고 있다면 모두 불면증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의학적으로 볼 때 수면 장애와 불면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잠들기 힘든 경우(입면 장애), 잠을 자다 중간에 자주 깨는 경우(수면유지 장애), 한 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려운 경우(재입면 장애), 너무 일찍 기상하는 경우(조기 각성), 숙면을 취했다는 느낌이 없는 경우(숙면 장애)를 통틀어서 수면 장애라고 부른다.

『수면 장애와 우울증』(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8)에 따르면, 불면증은 잠잘 때에 어려움을 느끼는 수면장애와 달리 낮에도 수면에 대한 불안감이나 괴로움이 계속되는 경우를 말한다. 또 작업능률이 떨어진다고 자각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실수도 적고 작업능률도 그다지 저하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불면증은 밤의 병일뿐만 아니라 ‘낮 시간 동안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수면 장애와 불면증은 별개이다.

노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불면증에 대해, 결국 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수면 장애는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수면 장애 중 한 가지라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잘못된 건강 상식이나 건강에 대한 지나친 욕망이 강박을 만들고, 단순한 수면 장애가 불면증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사실 사람에 따라, 나이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적정 수면시간은 다르다. 수면 부족이 심하지 않다면 수면 장애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시적 수면 부족으로 인한 수면 부채는 다음 날 잠을 더 자면 해결된다.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교유서가, 2016)에서 로저 에커치는 근대 이전의 유럽 사람들은 잠을 두 번에 걸쳐서 잤다고 한다. 연속적으로 자는 잠이 질이 높다는데 어찌 된 일일까? 그 시절 사람들이 첫 번째 잠에서 깨면 한밤 중이었다. 그들은 일어나서 소변을 보거나 사랑을 나누고 기도를 하는 등 여러 일을 했다. 그러나 두 잠 사이의 고독한 시간에 더 많이 한 일은 명상이었다. 지나간 하루를 돌아보거나 자신이 꾼 꿈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내적 자아를 만났다.

이 책 속에는 선사시대의 잠의 조건을 재현해 본 실험이 나와있다. 매일 밤 14시간 정도 인공조명 없이 몇 주에 걸쳐 살게 하자, 실험 참가자들은 산업화 이전 시대 사람들처럼 자주 끊기는 잠의 유형을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수면 장애로 불리는 단속적인 잠은 사실 태곳적부터 동물과 인류에게는 보편적이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는 연속적으로 잠을 자게 되었을까? 로저 에커치는 근대 산업화 이후라고 그 시점을 꼭 집어서 말하고 있다. 18세기 상업주의와 초기 산업화에 의해 밤에도 상점과 시장은 문을 열었고, 공장에서는 종일 작업을 하여 생산성을 향상했다. 거기에 인공조명이 널리 보급되면서 밤은 점점 더 밝아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늦게 잠자리에 들게 된 인류는 그럴수록 중단 없는 잠을 자게 되었다고 한다. 연속적인 잠의 역사는 실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어느덧 ‘정상’이라는 범주를 꿰차게 되었다.

 

 

 

네모창이 밝히는 밤

근대화 이후, 24시간 중단없는 문화가 연속적으로 자는 잠이 정상이라는 믿음을 만들었고, 수면 장애에 대한 강박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밤문화와 야간근무는 이제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디지털 문화는 전 지구촌적인 연결과 끊기지 않는 온라인 상태를 유지하고 언제든지 접속하라고 한다. 그래서 잠을 못 이뤄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과 밥먹듯이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영상, 게임, 톡 등으로 휴대폰, 컴퓨터 등 네모창의 빛은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신체활동이나 외부활동보다는 습관적으로 손바닥 가까이 있는 네모창을 켜는 것이 편하다. 밤에 잠을 안 자니 낮동안은 정신이 흐리멍덩하다. 네모창 문화는 젊은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린아이들도 노인들도 네모창에 열중이다. 나도 내 가족도 모두 네모창에 빠져 산다. 유치원 다니는 조카는 유튜브 키즈에 눈을 뗄 줄 모르고, 70대 노인인 엄마도 친구들이 보내온 톡을 보느라 밤 깊은 줄 모른다.

하지만 아시는가? 네모창들에서 나오는 빛들이 몸속에 열을 만들고 그 열이 진액을 말린다는 것을. 또 몸의 진액을 만드는 물은 물에 해당하는 시간인 해시(亥時,서울기준으로 밤 9시 반~11시 반)와 자시(子時, 밤 11시 반~ 새벽 1시 반)에 자면 채워진다. 요즘 이 시간에 자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진액은 더욱 고갈된다. 이렇게 되어 동양 의학에서 만병의 근원으로 불리는 상태인 ‘음허화동(陰虛火動)’이 된다. 

음(물)이 부족하면 몸속의 불(열)을 끄지 못해서 내부 장기가 뜨거워지고 각종 증상이 생긴다. 특히 물 부족은 몸속의 불을 주관하는 심장의 기능을 조절하지 못해서 두통, 불안, 수면 장애를 일으킨다. 더 심해지면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번질 수 있다. 또 음허는 혈허로 이어지는데, 혈허 증상 중 빈혈은 주간에 각성이 잘 되지 않아 쉽게 카페인에 의존하게 한다. 카페인은 이뇨작용으로 몸에서 물을 빼면서 몸속의 열을 더욱 조장한다. 게다가 카페인은 철분 흡수를 저해하기 때문에 빈혈을 악화시킨다. 

 

 

『수면 장애와 우울증』에서 시미즈 데쓰오는 수면 부족이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수면 부족이 감정에 끼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실험 결과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수면 부족에 처한 사람은 좋은 것(긍정적인 것)이거나 중립적인 것은 잊어버리는데 반해 나쁜 것(부정적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면 부족이 뇌의 전두전야의 활동을 떨어뜨리고 전두전야가 평소 억제하고 있는 편도체의 활동을 억제할 수 없게 된 이유다. 편도체는 불쾌한 정동의 중추이다. 결국 수면이 부족하게 되면 불쾌한 정동을 억누르기 어렵게 된다. 설명하는 메커니즘은 다르지만 동양 의학이나 서양 의학이 비슷한 결론을 내고 있다.

 

 

수면제와 네모창을 대신할 일상

한 할머니가 수면제를 받아가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그녀는 매일 수면제를 먹지는 않지만 수면제가 집에 없으면 불안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스마트폰 사용자들도 이 네모창이 없으면 불안하다. 더욱 밝아진 인공조명과 총천연색의 빛을 내뿜는 온갖 전자기기들에 둘러 쌓여 사는 삶. 우리는 밤을 더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밤을 잃었고 그 대신 강박과 중독을 얻은 것 같다.

『동의보감』에는 이도요병(以道療病)이라는 말이 있다. 도로써 병을 치료하라. 질병을 고치는 데는 일상의 습관을 고치는 것이 침이나 약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데 습관을 고치는 것은 도를 닦을 정도로 어렵다는 뜻이다. 솔직히 일상을 바꾸는 것보다는 수면제 등 약을 먹는 게 훨씬 편하다. 당뇨, 혈압 등 만성질환 환자들은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 질병관리에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다. 약이 있으니까 에잇! 하면서 식이조절을 못하고 달고 짠 음식을 먹어버린다. 약에 의존하면서 질병에 점점 수동적이 되어 간다.

하지만 최근 수면 의학도 수면제보다는 일상의 루틴을 바꿀 것을 권하고 있다. 수면제가 수면 장애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삶만이 근본적 치료이다. 하지만 네모창에 대한 중독과 그것이 주는 불안은 그 기준도 모호하고 치료약도 없다. 그렇다고 디지털 시대에 네모창을 없앨 수 없고 네모창이 주는 이익도 분명 있다.

나의 경우, 공부를 하고 글을 쓸 때 노트북이 필수이다. 또 휴식을 취할 때는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거나 휴대폰으로 SNS를 보거나 포탈에서 뉴스를 본다. 내 즐거움은 먹는 것과 네모창에 집중되어 있다. 내 일상이 심플한 것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내 즐거움이 왜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즐거움이 너무 수동적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와 많이 다른가?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당신도 나도 각자의 특이성들을 잃어버리고 너무 동질화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가 밤을 잃으면서 함께 잃어버린 것이 ‘낮’과 ‘밖’이라고 생각한다. 밤에도 낮에도 몸은 실내에 갇히고 장시간 네모창과 대면한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약국에는 비타민 D 제제³의 판매가 급격하게 늘었다.) 수면 장애 치료 중 하나는 낮에 충분히 햇빛을 쬐어 생체 리듬을 살리는 것이다. 낮의 빛과 활동성이 줄어든 만큼 우린 그 활동성을 구성하는 여러 관계와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취미, 이벤트 같이 거창한 거 말고라도 네모창 밖에서 능동적 즐거움을 만들 수 있는 루틴은 무엇일까? 

 

 

최근 나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는데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다. 요가를 하고 나면 몸도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야행성인 내게 아침 요가는 스킵되기 일쑤다. 일단 이 요가가 습관이 될 때까지 노력해 보려고 한다. 아침 요가가 루틴으로 즐거움이 되면 야행성인 내 일상에 인공의 빛 대신 햇빛이 더 들어올 것이다. 햇빛과 함께 어두운 밤도 좀 더 찾아들 것을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수면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상의 팁을 알려드리며 글을 마치려 한다. 아래는  『수면 장애와 우울증』에서 발췌했다. 

 

  1. 수면 시간은 사람에 따라 제각각, 낮에 졸려서 힘들 정도만 아니면 충분하다.
  2. 자극적인 것을 피하고(e.g. 오후 3시 이후 커피 마시지 않기) 자기 전에는 자기 나름대로 긴장 완화 방법을 쓴다(가벼운 독서, 음악, 미지근한 물로 목욕, 근육 이완 스트레칭 등).
  3. 졸음을 느낀 후 잠자리에 든다. 취침 시간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다.
  4.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난다.
  5. 빛을 이용하여 양질의 수면을 취한다(낮에는 햇볕을 쬐고 밤에는 조명이 너무 밝지 않도록 한다).
  6. 규칙적인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습관을 갖도록 한다.
  7. 낮잠을 잔다면 오후 3시 이전, 20~30분으로 한다.
  8. 수면이 깊지 않을 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다.
  9. 취침 전 음주는 깊은 수면을 방해하고 도중각성의 원인이 되니 삼간다.NM

     

     

     

    주)

    1. 향정은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여 환각, 각성, 수면 또는 진정 작용을 한다. 

    2. 향정의 장기 복용시 가장 큰 부작용은 의존성이다. 의존성이 생겼을 때 복용을 중단하면 반동성 불면증, 비현실감, 사지의 저림 및 무감각, 환각, 간질성 발작, 신체적 접촉에 대한 과민성, 두통, 근육통, 극도의 불안, 긴장, 초조, 혼동, 흥분성 등의 금단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3. 비타민 D는 햇빛을 받으면 피부에서 자연적으로 생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비타민D 부족이 증가하고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글 : 둥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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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탁에 와서 생전 처음으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엄청 흔들렸다. 내 흔들림과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다. 
        그 친구들과 약방을 차려볼까 한다. 약학과 인문의역학이 버무려진 ‘인문약방’을!

 

 

댓글 2
  • 2019-09-03 12:07

    공감이 됩니다.
    정보는 넘치고 자기 스스로 주도적으로 삶을 꾸리지 않는 노후의 모습이 우울하네요.
    정보와 지식
    앎과 삶의 실천.
    잠도 그런거였군요.

    먹고.자고.놀고.일하고 놀고....
    뭔가 하나라도 제대로 안되면 삐긋거리리게 되니 늘 조화롭게 균형잡아가도록 해야겠네요.
    잘 앍었습니다.

  • 2019-09-09 09:50

    서양의학과 동양의학 그리고 밤에 대한 역사적, 철학적 사유가 총 망라된, 매우 지적인 글이네요. ^^
    밤을 잃어버리면서 영성도 잃어버리고,
    인간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자기 존재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좋은 글, 저도 잘 읽었습니다.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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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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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5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29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252
우현의 독서가 테크트리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우현 2024.02.05 |
조회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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